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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글

홍동백서 치킨피자

by 책벌레아마따 2024. 1. 6.

홍동백서 치킨피자

 

 

명절에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글지글 기름 냄새가 풍기고 사람들로 복작거려야 흥이 나건만 분위기가 갈수록 썰렁해지고 있다. 대가족의 해체에 이어 인구 감소의 영향인 것을 어찌 하겠냐마는 왠지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다.

 

좌우지간 조상님을 추모하는 차례도 지내고 서로의 안부도 확인할 겸 모처럼 일가붙이들이 함께하는 설 명절이다. 그리고 한민족 고유의 전통은 아니어도 오랜 관습이자 풍속이 바로 제례 문화다. 그런데 사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원인 제공자는 누구건 간에 좋은 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우격다짐과 드잡이가 벌어지기까지 한다.

 

갈등은 흔히 제수를 준비하는 중에 사소한 의견차로 시작되어 나중에는 문중 땅 문제로까지 비화된다. 자손들이 우애롭게 지내는 게 가장 큰 효도라 치면, 효도의 대상이 이미 저 세상 분일지라도 불효는 불효다. 산해진미로 상차림을 한들 불협화음을 빚을 바에야 냉수 한 사발이라도 정성된 마음으로 올리는 게 백 번 나을 듯하다. 솔직히 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을 차려 보았자 전부 산 사람들 차지가 아닌가.

 

오랜 세월 동안 ‘홍동백서, 어동육서, 조율이시, 좌포우혜’ 같은 진설법이 전통적인 제례 예법으로서 전승되어 왔지만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게다가 지역과 집안에 따라 예법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 공연한 간섭이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밥·국·탕·술·갱·고기·조기·과일·산적·전·포·나물·식혜 등 격식을 갖춰 진설하려면 정신적·육체적·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전이나 적만 해도 품이 어지간히 들다 보니 디데이 며칠 전부터는 착착 준비가 필요하다.

 

여성은 출가하면 성씨가 다른 집안의 가풍을 익히고 봉제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여느 가정의 주부보다도 종갓집 맏며느리인 종부는 일 년 열두 달 손에 물이 마를 새 없다. 다달이 기일이 들어간 달력을 쳐다보면 한숨부터 나오고, 한바탕 북새통을 치루고 돌아서면 다음번 기제사 걱정에 몸서리가 난다. 종부의 애환을 종부가 아니고서 누가 알랴. 따지고 보면 ‘동학농민혁명’에 앞서 ‘며느리의 반란’ 그중에서도 ‘종부의 반란’이 일어났을 법하건만 묵묵히 그 모진 세월을 견딘 윗세대 여성들이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바야흐로 유구한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반기를 들고 철옹성 같은 전통의 장벽을 타파하려는 일단의 무리가 등장했으니 이름하여 신세대 며느님들이다. 불만이 있어도 혼자 속으로 삭이던 이전 세대와 달리 이들은 과감하다. 시댁에 가느니 명절 연휴 근무를 자처하는 맞벌이 며느리가 있는가 하면, 남편은 시댁으로 자신은 친정으로 각자 별도의 공간에서 명절을 쇠는 당찬 며느리도 있다. 이런 추세라면 친정집에 와서 올케를 갈구는 시누이들, 음식만 해치우고 TV 보며 뒹굴뒹굴하는 남편들 모두 앞으로는 얄짤없다.

 

남몰래 옷고름으로 눈물 훔치던 한과 설움을 당대에서 끝내겠노라 제사 철폐를 선언한 화통한 시어머니들도 당연히 반란의 주역이다. 며느리들이 이에 격하게 환호하며 고부간 합심하여 제례 문화의 신풍속도를 그려 나가는 중이다. 명절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오후에는 집안 여성들의 수고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온 가족 함께 외식하는 가정이 생겨난 것은 긍정적인 변화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몇 술 더 떠서 아예 차례를 접고 가족단체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덕분에 명절 연휴 기간 관광산업은 특수를 누린다.

 

미풍양속이 되어야 할 제례 문화가 세대간, 고부간, 부부간, 동서간 갈등의 온상이 되자 보다 못한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교통정리에 나섰다. 작년 말 선보인 ‘전통제례 보존 및 현대화 권고안'이 그것인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제례의식을 간소화·표준화한 데 의미가 있다. 꽤나 파격적인 권고안을 요약해 보면, 고인이 살아생전 즐겨 드시던 음식 위주로 해서 생일상처럼 차려도 된다, 부모님의 기일이 다른 경우 같은 날에 합사해도 무방하다, 제사 지내는 시간은 오후 6시 이후 언제든 상관없다.

 

형식에 목매지 않고 음식의 가짓수를 확 줄일 수 있으면 서민들의 빠듯한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건 분명하다. 또한 기제사의 경우, 예전 같으면 밤 12시에 제사를 지내고 이튿날 출근과 등교에 지장이 있었는데 그런 고민도 덜 수 있다. 이렇게 합리적이고 훈훈한 아이디어를 진작 좀 제시했더라면 최소한 ‘눈속임용 팔 깁스’ 사태는 막지 않았을까 싶다. 만시지탄이나마 이제라도 새로운 제례법이 나와서 다행이다.

 

제례 문화는 그동안 ‘명절 증후군’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쓴 채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취급된 측면이 없지 않다. 여하간 가정의 평화와 화목이 우선이다. 산 사람의, 산 사람에 의한, 산 사람을 위한 허례허식과는 그만 작별할 때가 되었다. 조상님들, 앞으로는 명절 차례상에 피자가 올라가고 기일 제사상에 치킨이 올라가더라도 부디 너그러이 봐주십쇼.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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