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영웅 윤봉길 의사
때는 바야흐로 1932년 4월 29일, 봄비가 흩뿌리는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에 인파가 쇄도했다.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축하를 겸한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진즉부터 예고된 터였다. 전승기념이라 함은 일본군이 중국 ‘19로군’을 치열한 전투 끝에 상하이에서 퇴각시킨 사건을 자축하려는 것이다.
이날 아침, 무심한 하루는 또 다시 시작되었으되 왠지 비장감마저 감도는 듯 분위기가 무거웠다. 이는 하늘 아래 윤봉길과 김구, 오직 두 사람만의 감상(感傷)이런가. 그런데 정작 거사를 목전에 둔 윤봉길의 태도에서는 평상시와 조금치의 다름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침 밥상 앞에 앉아 안연자약하게 음식을 넘기는 것하며, 과연 천하가 인정한 인물다운 범상치 않은 면모였다.
식사가 끝나자 ‘한인애국단’ 입단선서식 직후 구입한 6원짜리 금색시계를 김구의 낡은 시계와 바꾸기를 자청했다. 자신에게는 이내 소용없게 될 물건임을 알기에 한사코 만류하는 김구를 설득했고, 이어 회색 양복 주머니 속 몇 푼의 돈마저 건넸다. 그리고는 “후일에 만납시다.” 김구의 목 메인 마지막 작별 인사를 뒤로 한 채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홍커우 공원 내 기념식장 단상 앞에 도열한 군중의 무리 속에서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행사 전날에도 이곳을 방문하여 기념식 예행연습을 주도면밀하게 살폈던 그였다. 어느 누구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거사 직전 김구와 은밀하게 나눈 대화 내용을 보면 그 의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최근에 거사를 도모하고자 하나 적임자를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는 김구의 말에, “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안온하여집니다. 준비하십시오.”라며 목숨부터 흔쾌히 내어놓은 그가 아니던가.
장도에 오르기 전 고국에서의 행적을 보더라도 결코 예사롭지 않다.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을 개설하고 독서회를 결성하고 농민독본을 저술하는 등 농촌계몽과 농촌부흥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나이가 한번 집을 떠나매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으리)’이라 적힌 유서 아닌 유서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에게는 조국의 독립을 기필코 쟁취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31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했다. 1932년 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밝힌 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했다.
운명의 순간이 숨죽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11시 40분경,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해 들여간 2개의 폭탄 중 자살 용도의 도시락 폭탄은 발밑에 놔둔 채 물통 폭탄을 단상 위로 힘껏 내던졌다. 그 자리에서 상하이 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이 즉사했다. 제3함대 사령장관 노무라 기치사브로,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국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의거 즉시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5월 28일 상하이 파견군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일본 오사카 육군위수(衛戍)형무소를 거쳐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외곽 육군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역사에 길이 남을 이 장쾌한 의거가 기폭제가 되어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항일연합전선을 펼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장제스는 ‘100만 중국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혼자의 힘으로 이루었다’며 극찬했다. 한편 윤 의사의 유해는 1946년 6월 30일 해방 이후 첫 국민장을 치룬 뒤, 7월 9일 애국지사들의 유해가 모셔진 서울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간 윤 의사가 처형되기 전에 구금되었던 장소가 일본 오사카 성 근처라고만 알려졌으나, 우리나라 독립기념관 연구원들의 노력으로 오사카 성 안 위수형무소의 옛 터로 밝혀졌다. 세상에 목숨이 둘인 사람이 어디 있으며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우국충정의 일념에서 비롯된 담대함과 투지로써 대한 독립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진 윤 의사였다. 약관 25세의 꽃다운 나이, 정녕 그는 짧고 굵은 생을 살다간 난세의 천하영웅이다.
2016년 12월 13일
홍커우 공원에 비가 내린 그날처럼 오늘도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친 그의 뜨거운 애국심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피로써 나라를 지킨 순국선열들의 값진 희생이 빛바래지 않도록 후손인 우리들이 더욱 더 이 나라를 잘 돌보고 가꾸고 지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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