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기다리며
유리창에 번지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들과의 아련한 추억들이 뇌리를 스친다. 하교 시간은 다가오고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내리면 부리나케 학교로 달려가 아들과 우산을 나란히 받쳐 든 채 집으로 돌아왔다. 한 번만이라도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고사리 손을 부여잡고 귀엣말을 주고받으며 오래도록 빗길을 함께 걷고 싶다.
고교 시절 중국 상하이로 수학여행을 다녀왔을 때는 차를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용돈을 아껴 항저우에서 구입한 용정차를 선물로 내놓았다. 다기에 부지런히 찻물을 부어 가며 여행의 후일담을 듣는데 소설 삼국지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상하이와 캐딜락 택시가 도로 위를 달리는 쑤저우는 제법 경제적 안정을 이룬 듯했다.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맞춰 산이 눈에 안 띄고 평원이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풍부한 녹지공간이 돋보이더란다. 여행 내내 먹고 자는 불편함은 없었으며 현지인들이 순박해서 좋았다고 덧붙였다. ‘상하이 엑스포’에서의 에피소드 하며 첫 해외 나들이가 순조롭게 마무리된 것 같다. 아들의 섬세한 묘사력에 힘입어 거실에 앉아 그곳의 풍광을 머릿속에 훤히 그려 보았다.
군 복무를 마쳐야 마음이 안정될 것 같으니 입대 신청을 하겠다는 말을 처음 들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미 속이 어떤 줄도 모르고 이왕 하는 군 생활인데 GP근무를 지원하겠다며 한 술 더 떴다. 결국 8전9기 끝에 애초 바라던 DMZ 안으로는 못 들어가고 전방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아들이 휴가 나오는 날은 기쁘기가 한량없으나 귀대일은 가슴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가는 듯 아팠다. 멀고먼 휴가 길을 오가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 그런지 불평 한 마디 입 밖에 내지 않아 더욱 안쓰러웠다.
전역한 직후에는 친구와 열흘 동안 일본 후쿠오카를 여행했다. ‘수박 겉핥기’가 아닌 현지의 속살을 체험하고픈 마음에 하루 만 오천 보를 걸으며 여행자들의 발길이 드문 곳을 찾아다닌 모양이다. 곳곳이 청결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했다고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한밤중 숙소에서 인적이 끊어진 도로를 내려다봤을 때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 하나 없건만 운전자들이 교통 신호를 철저하게 지키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현명하다’는 탈무드의 가르침에 충실한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경험이 축적될수록 견식도 넓어질 거라 믿는다.
아들이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학교에서 생활하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일상을 함께했다. 단 하루도 예외 없이 일편단심 공교육에만 충실토록 했고, 안전이 못 미더워 단 한 번도 무슨 캠프나 프로그램에 참가시킨 일이 없다. 덕분에 일 년 365일을 아이와 오롯이 공유할 수 있었다. 껌딱지처럼 찰싹 붙어 지내던 우리 가족에게도 아들이 기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무엇보다 보름에 한 번, 주말 외출 때나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으니 그보다 잔인한 형벌이 없었다. 그러나 이는 ‘짧은 만남, 긴 이별’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이 시작되고 또 군대에 입대하면서, 아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아이가 없는 집은 내게 빈집과 같았다.
아들은 태어나 지금까지 대놓고 반항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부모의 뜻을 매번 선선히 따르지도 않는다. 여하튼 성장기의 고집스런 행동조차 ‘반항’이라 몰아붙이지 않고 ‘소신’으로 이해해 주려 노력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을 테니 때가 되면 자신의 길을 찾아 가겠거니, 조바심 내지 않고 아이를 믿고 기다려 준 것도 맞다. 사실 연륜과 경험이 풍부한 어른이라 해서 항상 옳은 판단을 내린다는 보장은 없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괜한 생떼도 아니다. 더군다나 훈계나 체벌의 근거가 미약한 상황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녀에게 욕설이나 손찌검을 하는 것은 부모의 도리라 보기 어렵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들을 마중 나갈 적에는 하늘의 보름달도 분명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아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봤던 보름달은 울다 지친 듯이 퉁퉁 부어 있더라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아들을 만난 순간조차 떠나보낼 아쉬움으로 가슴이 미어졌었다. 적막한 밤이 찾아오면 어둠에 휩싸인 창밖으로 외롭게 서 있는 가로등 몇 개가 보인다. 그 불빛 하나하나에 새겨진 영롱한 아들 얼굴이 어느새 어둠보다 더 짙은 그리움이 되어 가슴을 알싸하게 만든다. 비가 와도 걱정 눈이 와도 걱정, 더워도 걱정 추워도 걱정, 객지에 머무는 아들 걱정에 잠자리가 편할 날이 없다. 그러니 아픈 데는 없니, 옷 따뜻하게 입어라, 찬 음식 가까이하지 말거라, 코흘리개 때부터 해 오던 오래된 잔소리를 여태 고장 난 축음기처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자식을 떠나보내고 또 떠나보내면서도 이별의 아픔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 익숙해지기는커녕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버렸다. 그럼에도 무시로 눈길이 대문 쪽을 향하는 것은, 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훔쳐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도둑을 기다리는 어미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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