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희망가를 불러 보자
4월 27일 오전 9시 28분, 세계의 이목이 판문점에 집중된 가운데 남북 두 정상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잡았다. 하이라이트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에 첫발을 내딛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이끌고 북으로 깜짝 월경(越境)했다가 이내 되돌아오는 장면이었다. 설령 연출된 행위라 하더라도 흐뭇한데 의도된 바가 전혀 없다고 하니 더욱 감동적이다.
당일 오후에는 두 정상이 공동합의문을 발표하기 위해 판문점 평화의 집 앞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라고 대내외에 천명했다. 불과 수개 월 전만 해도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휩싸였던 한반도가 아니던가. 눈앞에 전개되는 현재 상황이 왠지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것은 비단 필자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과거 평양에서 진행된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비정치적 주제를 다루었다. 그에 반해 이번 판문점 회담에서는 비핵화를 핵심 의제로 삼았다. 그 결과 ‘한반도 내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기대 이상의 의미 있는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그런데 합의 결과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비핵화’를 적시하기는 했으나 세부적인 로드맵은 누락되었다는 회의적인 시각과 추후 북한이 입장을 번복하기 위한 여지를 남겨 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없지 않다. 사실 비핵화가 보장되지 않으면 그 어떤 합의도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비핵화의 목표를 수행할 의지가 분명하다면 핵무기·핵시설·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등의 폐기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 및 실천이 수반되어야 한다.
과거의 전례에 비춰 볼 때 지금 북측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이유는 상당하다. 그렇다고 해서 의심의 눈초리로만 바라본다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합의 전에는 당연히 의심하고 경계할 수 있지만 일단 합의가 끝났으므로 상대방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현재로서는 지나친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시기상조다. 섣부른 판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올 초부터 북측이 변화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긍정적 신호라 여겨진다. 향후 그들이 취해 나갈 후속 조치를 주시하면서 최종적인 판단과 해석은 잠시 유보해도 좋을 듯하다. 물론 또 다시 신의를 저버리고 합의를 파기한다면 그때는 용납하기 어렵다.
그들은 오랜 시간 폐쇄적인 국가 체제를 유지한 채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아왔다. 이제라도 보통의 정상적인 국가를 꿈꾼다면 만시지탄이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굳은 의지를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할 때, 한 겨레 한 핏줄로서 응당 협력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민족의 평화 통일이라는 크나큰 과제가 남아 있다. 이에 대한 희망을 끝내 저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한민족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전 세계를 통틀어 우리와 지리적으로 이처럼 가까운 나라가 또 있을까. 경계를 넘는 데 단지 몇 걸음이면 족하거늘 이제껏 서로에게 철저히 금단의 땅이었다는 사실이 회한을 자아내게 한다. 이번 남북 두 정상의 만남에는 여느 정상회담과는 달리 통역이 필요치 않았고, 언어나 문화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장애도 없었다. 닮은꼴의 얼굴 생김새만으로도 동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남북이 한자리에 모여 웃고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평화의 새싹이 움트는 것 같은 소중한 만남이었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지 65년 만에 우리는 평화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이 내린 천재일우의 기회를 무위로 돌릴 것인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결코 판문점 선언이 단순한 선언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진정한 실천으로써 8천만 한민족이 함께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만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녕을 위해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에 대한 보은이다.
봄은 쉬이 오지 않는다. 엄동의 북풍한설을 견디고 비로소 봄날의 명주바람을 맞이한다. 또한 아무리 두터운 얼음장도 실금이 자꾸 번지다 보면 반드시 물이 되어 흐를 날이 온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천리가 되고, 실개천이 모여 강과 바다를 이룬다고 하지 않던가. 우선 비무장지대 안쪽, 군사분계선으로부터 400m 떨어진 곳에 섬처럼 자리한 최접경 지역인 대성동 마을부터 오매불망 기다리던 한반도의 봄이 고이 내려앉기를 깊이 염원한다.
2018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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