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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글

섭씨 40도 땡볕 아래

by 책벌레아마따 2018. 9. 7.

섭씨 40도 땡볕 아래

 

 폭염과 열대야를 이야기할 때면 살인 폭염으로 불리던 1994년 여름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폭염의 정점을 찍고도 남을 만큼 기상 관측 이래 최고치를 기록한 바 있다. 그런데 금년 여름,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기록은 깨질 운명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밤에도 30도를 웃도는 초열대야가 이어지고 온열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만도 수십 명에 달한다. 이쯤 되면 단순한 더위가 아니라 재난 수준이다. 폭염은 하루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일 때, 열대야는 야간 최저기온이 25도 이상일 때를 말한다.

 

  여름 내내 몸이 기억한 단어는 덥다뿐이다. 불타는 여름의 증표인지는 모르겠으나 생전 모르고 살았던 땀띠가 온몸에 돋아났다. 이따금 신경 써서 복달임을 준비했건만 한번 집 나간 입맛은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나마 선풍기와 에어컨이 더위를 달래 줄 대안인지라 예년에 비해 부쩍 가동했다. 더위 공세에 말려들어 냉방기 앞에서 다소 방심한 터에 이러다가 전기세 폭탄을 맞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신경 쓰인다. 더군다나 현행의 전기요금 체계는 일반 가정의 전력 소비자들을 왠지 봉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에 정부가 여름철 냉방기 사용에 따른 서민 가정의 전기세 부담을 덜어 주겠노라 공언하고 나섰다. 사상 초유의 폭염 덕분에 세금이 깎인다는 말은 살면서 듣느니 처음이다.

 

 가마솥더위 앞에 맥없이 무너진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밭에서 자라는 과수와 작물들도 극심한 탈수증에 허덕였다. 설상가상으로 혹독한 가뭄에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채 밑바닥을 훤히 드러낸 저수지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바다 양식어들도 높은 수온을 견디지 못하고 줄줄이 폐사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골목에 숨어 사는 길고양이도 밤낮 없이 내리쬐는 후끈한 열기에 흐느적대기는 마찬가지다.

 

 가뭄 해갈이 절실한 지역이건 아니건 오죽하면 온 국민이 태풍을 학수고대했겠는가. 용광로처럼 한껏 달궈진 한반도를 조속히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태풍이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매년 이맘때 태풍이 상륙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그런데 오지 말라고 할 때는 꾸역꾸역 잘도 오더니 정작 오라고 빌 때는 오지 않는다. 유독 한반도를 피해 일본이나 중국으로 몰려가는 태풍이 야속하기만 하다.

 

 솔직히 태풍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다. 해마다 여름과 가을에 걸쳐 한반도에 인명과 재산 피해를 가져다주니 미움을 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태풍이 반드시 악영향을 끼치는 고약한 존재만은 아니다. 태풍은 바닷물을 순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플랑크톤을 분해하여 수질을 정화시키고 녹조를 없앤다. 태풍은 참나무의 뿌리가 땅에 단단히 박히도록 하는 데도 일조한다. 태풍이 불어 천지가 뒤흔들려야 송이버섯이 많이 달린다며 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은 태풍을 반긴다.

 

 드디어 귀가 번쩍 뜨일 만한 관측이 흘러나왔다. 2012덴빈’ ‘블라벤에 버금가는 세력을 갖춘 태풍 솔릭이 한반도를 관통한다는 것이다, 현재 해수면 온도가 높아 느린 속도로 북상하게 되면 피해가 더 커진다며 연신 주의를 환기시켰다. 남해안의 경우는 400mm의 폭우가 쏟아진다니 바짝 긴장되는 한편 기대감에 부풀기도 했다. 어느새 태풍은 물러갔다. 그런데 소란스럽던 기상 예보와는 결과가 딴판이다. 집 마당의 수련을 키우는 고무통(일명 고무 다라) 하나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정작 하늘의 강에서 물폭탄이 쏟아진 것은 태풍이 소멸된 직후부터다. 마치 여름의 피날레라도 장식하려는 듯 게릴라성 폭우가 연일 퍼부었다. 메말랐던 땅은 흡족해졌지만 서울 등지의 침수 지역 주민들을 생각하면 죄송할 따름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름 한철을 나는 동안 자연의 엄격함을 새삼 느낀다. 인간이 자연에 순응해야지 자연을 인간에 굴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그 누구든 일체의 분별이나 차별 없이 대하는 자연을 원망할 이유는 없다. 끝이 안 보이던 여름도 이제 끝자락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거실로 나와 보면 귀뚜라미 소리가 귀를 찌른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가을이기에 더욱 반갑다. 우리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또 한 차례의 여름을 이렇게 보낸다.

2018년 9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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