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2015년 12월
나는 코흘리개 때부터 새벽마다 머리맡에 배달되는 조간신문의 싱그러운 잉크 냄새를 맡으며 성장했다. 이를 테면 후각을 자극하는 새 신문지 특유의 카본 블랙 냄새가 유년의 향기인 셈이다. 배곯는 사람이 널린 궁핍한 시절에도 신문 구독을 포기하지 않으신 선친 덕분이다. 신문 활자와 친숙해진 즈음에는 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책벌레’라는 별호가 붙어 있었다. 내게 있어 글과 책은 점차 ‘숨’과 동의어가 되었다. 아무튼 이 오래된 습관이 오늘날까지도 창작을 향한 타는 목마름과 열정의 꺼지지 않는 고마운 불씨가 되고 있다.
창작의 고통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애송이에게 문학 혼을 불어넣어 준 몇몇 은인이 있다. 국민 학교 4학년 담임 K선생님은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문학적 감성을 처음으로 일깨워 주신 분이다. 문학 인생의 첫발을 내딛은 계기는 고교 시절 백일장 입상이다. 고교 담임이신 국어과 L선생님이 모친상을 당하셨을 때 댁으로 위로 편지를 띄운 적이 있다. 선생님은 내가 보낸 편지를 몇 번이나 읽으셨고 눈물까지 흘리셨다고 했다. 어린 제자에게 사람의 마음을 사는 작가가 될 것을 당부하셨다.
국내 최대 일간지 C일보 편집국의 S부장과는 나이와 신분을 초월해 문우가 되었다. 내 글의 단골 독자를 자처하시며 비평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포항 K형과 전주 L형, 글에 심취한 이 두 명의 글 선배로부터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배웠다. 신춘문예 삼수생이던 A형제가 주선하여 그의 모교 스승이자 신춘문예 심사위원인 Y교수로부터 필력을 검증받은 일은 내게는 유의미한 추억이다. ‘천생 글쟁이’라는 덕담에 고무되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습작에 열심히 무두질을 했었다.
크건 작건 내가 속한 집단에서는 늘 구성원을 대표해 글을 써야 하는 과제가 부과되었다. 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의 환영사와 환송사, 친구들의 작문숙제, 국군장병 위문편지 등을 전담했다. 교회에서도 주일학교 교사로서 각종 행사에 필요한 문건 작성은 기본이고, 학부모들에게서 부탁받은 글 심부름은 덤이었다. 학보·사보·일간지·잡지에 글을 올리고, 연극 극본을 써서 직접 무대를 연출하기도 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원고지에 매달려 하얗게 지새우면서도 사서 하는 고생이라 고단한 줄 몰랐다. 오히려 글과 바꾼 원고료로 친구들에게 한 턱 쏘는 재미에 신이 났었다. 광화문 우체국 같은 공공장소의 서적비치대에서 내 글이 실린 책자를 발견할 때는 쑥스러우면서도 뿌듯했다. 어딘가에 글이 실리면 며칠간은 전국에서 편지가 답지했다. 예전에는 흔히 필자의 주소가 공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다 보니 손으로 직접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눌러써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퇴고를 거듭하다 보면 팔과 어깨를 비롯해 온몸이 뻐근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장마철이면 으레 눅진해진 원고지는 잉크가 번져 수묵화 화첩이나 떡이 되기 일쑤다. 육필 원고 뭉치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속상한 마음에 며칠간 곡기를 끊은 적도 있다. 지금이야 문서 작성이나 보관이 말도 안 되게 쉬워져서 원고지마저 귀했던 과거와는 천양지차가 아닐 수 없다. 그때 그 시절 구식 컴퓨터라도 한 대 있었더라면, 활화산 같은 문학적 열정이 녹아 있는 청춘작을 여직 고이 간직하였으련만.
유학 중에는 아사히신문 주최 글짓기 대회에도 참가하고, 센류(川柳)를 지어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아와지(淡路)를 방문하고 쓴 기행문은 현지 고교 국어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읽고 감상 토론을 했다고 들었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이들과 폭넓게 교류할 수 있었던 배경도 따지고 보면 글이다.
오매불망 글을 아끼고 사랑한 내게도 창작 활동의 휴지기는 있었다. 학업과 생업에 전념하던 시기 그리고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던 시기에는 글쓰기에 불성실할 수밖에 없었다. 숱한 이야기들을 원고지에 옮기지 못하고 가슴에만 묻어 둔 채 흘려보낸 그 시간들이 이제 와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담임의 요청으로 학교 신문에 글을 선보이면서 오랜 동면에서 깨어났다. 이어서 연거푸 문학상 공모전의 입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나만의 르네상스를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생각지 않게 건강에 비상등이 켜졌다. 종합 병원이며 용하다는 한의원이며 문턱이 닳도록 넘나들었건만 백약이 무효했다.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다가 온 가족이 시골로 이주했다. 졸지에 도시를 벗어나 자연에 파묻혀 한두 해를 지냈을 무렵 불현듯 내 안에서 창작 의욕이 꿈틀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연과 교감하면서 문학적 영감이 되살아난 듯하다.
글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머리에 쥐라도 난 것처럼 고통스럽다. 하지만 글쓰기에 몰입하는 시간만큼 진정 행복한 시간은 없다. 내 안의 속살을 드러내는 은밀한 작업 뒤에는 나만의 오롯한 기쁨이 감춰져 있다. 의식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나만의 고유한 언어로, 세상에 일찍이 존재하지 않던 어떤 새로움을 탄생시키는 그 쾌감이 좋다.
내 글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하면 내 글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 관련 검색어에 오르고, 소위 ‘퍼온 글’ ‘좋은 글’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인터넷 공간을 유영하는 것이 왠지 편치만은 않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세상에 떠도는 자신의 글과 조우하는 순간의 어색함과 두려움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로는 흔하면 천해질까 저어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들여 세상에 내놔도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힐 글에 집착하여, 칭찬을 받을까 비난을 받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으련다. 세상이 붙여 준 수필가다 칼럼니스트다 하는 이름 때문에 글 쓰는 데 있어 진정 자유로울 수 없다면 이 또한 마뜩치 않다. 사람들에게 글을 각인시키기 위한 그 어떤 작위적인 행위도 나는 원치 않는다. 단지 내 글이 세상 누군가의 가슴과 만나 한 순간 작은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부끄럽게도 자신이 쓴 글에 취해 객기를 부리고 오만에 빠졌던 청춘의 시간이 있었다. 이제는 나도 철이 들었는지, 활자화된 내 글과 만날 때면 두려운 마음부터 앞선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잉태하되, 세상으로 내보낸 뒤에는 일체의 간섭과 집착을 버리려고 한다. 내가 붓을 꺾지 않는 한, 다만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호구지책이 안 되는 글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이 비루하다고 느낀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이 주신 소박한 재능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다. 이 또한 나만의 방식에 의한 나눔이자 보시이며 세상과의 소통일 터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뜨거운 위무다. 글을 너무 사랑하기에 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마도 문자중독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거라 믿는다. 이만하면 문학과 각별한 인연으로 얽힌 삶이라 이야기해도 될지 모르겠다.
*센류(川柳); 5·7·5조 17음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정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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