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에 관한 글

다산이 들려주는 다스림의 미학

by 책벌레아마따 2016. 2. 21.

다산이 들려주는 다스림의 미학

                                                                         2016년 2월 16일 

 

  조선 후기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나라 살림은 결딴났고, 지배계층 양반들은 관념적 학문인 성리학에 심취한 채 당쟁을 일삼았다. 이때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초야에 몸을 담은 학자들 사이에서 실학의 학풍이 형성되었다. 지식 못지않게 실천을 중요시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적 사상이 젊은 학자들을 파고든 것이다. 다산 정약용 역시 일찌감치 실학의 거두인 이익의 성호사설에 감명한 터였다. 마침내 그는 실학의 체계를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가로서 큰 족적을 남기고, 1836(헌종2)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다산은 1762(영조38)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9년 과거에 급제한 뒤 정조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얻는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둘째 아들인 11살의 순조가 후사를 이으면서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전개되었다. 세도정치는 순조에서 헌종으로 다시 철종으로 이어지는 60여 년간 조정을 장악하다가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세력을 잃지만 국운은 이미 기운 상태였다.

 

  1801(순조2)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에 따라 천주교인인 다산도 투옥되었다가 강진으로 유배된 뒤 18년간의 신산한 삶을 이어갔다. 유배생활 도중 다산의 모친과 종친인 해남 윤 씨 윤단이 마련해 준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머물던 초당 뒷산에 야생차가 많았던 연유로, 산 이름과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멀리 있는 두 아들에게는 서신을 통해 가르침을 전했는데 특히 근검(勤儉)을 정신적 지침으로 삼도록 독려했다. 또한 귀양살이의 고초를 스스로 달래려는 듯 저술에 몰두했다. 그의 대표작인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유배지에서 풀려나던 해인 1818년 완성되었다. 이 책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정치 입문생들의 바이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목민심서는 목민관이라 일컬어지는 지방 관리를 위한 지침서로써 총 481272조로 구성되어 있다. 목민관으로 임명받은 때로부터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올바른 처신과 처세에 대해 들려준다. 젊은 시절 황해도 곡산 부사로 파견되어 선정을 베풀었던 경험과 행정가로서의 노하우를 담았다고도 할 수 있다. 목민(牧民)이란 백성을 보살핀다.’는 의미다. 목민관의 역할과 사명이 한 단어로 함축된 표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임지에 부임할 때는 행장부터 소박하고 검소해야 한다. 쇄마전이라 하여 부임지까지의 거리를 계산하여 말의 두수를 법으로 정하고 여비를 지급한 데는 이유가 있다. 쇄마전을 빌미로 백성의 재산을 탐하는 구실아치들의 횡포를 막고자 했다. 관아 식솔을 편안케 하면서도 철저히 관리 단속하는 일은 목민관의 최우선 과제라 할 수 있다(1편 부임).

 

  목민관의 모든 언행은 청렴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일거수일투족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금품이 오고가면 사사로운 감정이 생길 수 있으므로 공무를 수행하는 자라면 마땅히 경계할 일이다. 백성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면 백성은 식량을 잃게 되고 목민관 역시 청렴을 잃게 된다(2편 율기). 임금의 명령을 받들되 법과 양심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3편 봉공), 노약자나 부녀자를 포함한 소외 계층을 잘 돌봐야 한다(4편 애민).

 

  이, , , , , 공전의 6개 조직체계에 따라 인적자원, 조세와 호적, 과거제도와 제례, 군사제도, 재판과 형벌, 도로와 건축 등 민생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엄격하면서도 공정하게 다루어야 한다(5-10). 흉년이 들면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 구제에 나서야 한다(11편 진황). 목민관의 진면목은 임지를 떠날 때 드러난다. 부임 당시 지니고 갔던 세간짐만을 챙겨 단출하게 떠난다면 백성의 마음은 절로 얻을 수 있다. 목민관에 대한 평가는 백성이 내리는 것이다. 백성들이 나서서 목민관을 다시 우리 고을에 보내 달라간청한다면, 비로소 목민관의 소임을 무사히 마쳤다고 할 수 있다(12편 해관).

 

  ‘낡고 썩은 지붕에서는 노린재가 떨어지고 궁핍한 살림살이에 인적도 끊어지니 의관을 갖출 일도 없네그려. 몸에 병이 드니 잠마저 줄어들어 글 짓는 일로나 수심을 달래노라.’는 다산의 애끓는 심정이, 한시 구우(久雨 장맛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분명 그가 머물던 유배지 초막에도 동지섣달 삭풍이 불고, 오뉴월 장맛비가 세차게 몰아쳤으리. 오매불망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던 노학자의 가슴은 또 얼마나 서늘했을꼬. 오늘날 누군가 정치에 뜻을 두고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다산의 고뇌를 가슴으로 만나 볼 것을 권고하려 한다.

 

                                    

 

 

'삶에 관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중매체의 반란  (0) 2016.04.21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0) 2016.04.14
사는 날까지  (0) 2015.10.26
직업에 대한 고찰  (0) 2015.10.01
'서부전선 이상 없음'  (0) 2015.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