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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글

집밥 유감

by 책벌레아마따 2021. 10. 20.

집밥 유감

 

천고마비의 계절에는 말만 살찌는 게 아니다. 찬바람이 나면서 여름철 잃었던 입맛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이때, 본능에 충실하다가는 누구라도 체중이 붇기 쉽다.

 

예로부터 이르기를 식약동원(食藥同源)이라 하여 음식과 약은 뿌리가 같다 했다. 잘 챙겨 먹은 음식은 결코 보약만 못하지 않다. 식보(食補)가 중요한 이유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하듯 사람이 먹는 음식이 신체를 구성하고 또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나 이제나 ‘안살림 전문경영인’인 주부의 가치는 한참 저평가되어 있다. 가사 활동을 단순노동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도 그러려니와 힘만 들고 표가 나질 않으니 수고에 비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솜씨·맵시·마음씨·말씨·글씨 등 이른바 여성의 덕목인 ‘오씨’ 중에 특히 손끝이 야무져 일등 신붓감으로 칭송받던 주부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족의 피와 살이 될 음식 보약을 만들러 밥숟가락 내려놓기 무섭게 다시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들의 이름은 ‘엄마’다.

 

유년과 학창 시절, 멀쩡히 있다가도 엄마 얼굴만 보면 허기가 몰아쳤던 기억은 없는가. “난 어째 입맛이 없구나.”, “난 아까 많이 먹었다.”라며 자식 입에 무엇 하나라도 더 넣어 주려던 엄마들의 단골 레퍼토리 속에 감춰진 사랑의 기억과 함께 말이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서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했던 어리석음을 뒤늦게 후회한들 뭣하랴. 먹을거리만 생기면 식욕 부진이라 둘러대던 그 시절의 어머니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는데.

 

유명 맛집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신기한 게 하나 있다. 맛집을 찾아간 리포터가 손님들에게 음식 맛에 대해 질문하면, ‘어릴 적 엄마 손맛 그대로’라는 천편일률적인 대답이 나온다는 점이다. 그 말인즉슨 자기 엄마와 유명 맛집 사장의 음식 솜씨가 동급이라는 건데, 과연 예전의 어머니들이 다들 그렇게 음식 솜씨가 출중했는지 의문스럽다. 객관적인 검증이 불가능하다고 너무 미화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심정적으로는 그들의 근거 없는 허세가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름하야 집밥 즉 엄마밥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실 가장 좋은 반찬은 시장기라서 배가 몹시 고프면 음식 맛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음식은 맛으로만 먹는 것도 아니고 배가 고파야만 먹는 것도 아니다. 음식은 추억이다. 음식 하나하나에는 알록달록한 추억이 담겨 있음이다. 맛이야 어떻든 두 번 다시 엄마밥을 맛볼 수 없는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요리는 어려서부터 관심이 많은 분야 중 하나다. 아무거나 덥석덥석 먹지 못하는 민감한 식성 때문에 오히려 음식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요리를 즐기게 되었다.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 3개 셰프는 아니더라도 요리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과 철학은 있다. 요리할 때는 천연의 단맛과 감칠맛을 추출하거나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데 집중하는 편이다. 청결과 영양과 맛과 모양새에도 두루 신경을 쓴다.

 

전에는 본인이 만든 음식을 남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는 재미에 손님치레가 일상이었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진 뒤로는 가족을 위한 밥상에만 전념하고 있다. 한편, 음식과 음식을 만든 이에 대한 감사는 기본 예의라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식사를 마친 뒤에는 잘 먹었다는 인사를 꼭 전하라고 아이를 교육시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나저나 집밥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맞벌이 여성들이 불가피하게 주방에서 멀어지면서 외식과 배달 문화가 그 틈새를 파고든 것이 시초라 여겨진다. 더구나 1인가구의 증가로 그 흐름이 가속화되더니, 어느새 마트나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간편식이 집밥을 맹추격하고 있다. 최근 도시에서는 ‘밀키트(쿠킹 박스)’로 아침 식사 고민을 해결하기도 하는데 급성장 중인 새벽배송시스템 덕분이다. 가히 가정간편식의 전성기이자 집밥의 위기다.

 

시대의 흐름을 뉘라서 거스를까. 비록 집밥을 제치고 외식·매식 문화가 융성하더라도, 엄마 솜씨로 빚은 집밥의 따스한 기억들만은 혀끝의 미각으로나마 오래오래 남았으면 한다.

 

2021.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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