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행복 비결
대선이 확정된 2022년 새해가 밝았다. 이변이 없는 한, 금년에도 지구촌 최대의 과제는 바이러스와의 전면전이 될 듯하다. 코로나 신종 바이러스가 처음 창궐한 이후 지금까지 기세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아 심히 우려스럽다. 오미크론을 끝으로 더 이상의 변이 바이러스가 출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인류 공동체의 삶이건 일개인의 삶이건 문제적 상황은 시시각각 엄습한다. 그중에는 사전 예측이나 원인 규명은 물론 실체 파악조차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사실 무방비 상태에서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대책이 없다. 인생은 종종 고해(苦海)에 비유된다. 그만큼 삶의 시간 속에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것 같은 아뜩한 순간들이 허다하다. 하기는 순풍에 돛 단 듯 순탄한 날만 있다면 그것은 진짜 삶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삶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그러므로 비관적인 상황에 처했다 해서 시름에 빠진 채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런 때일수록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달라진다. 행불행이란 것도 결국 마음먹기에 달렸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지 않는가.
능히 알지만 실천은 굼뜬, 소박한 행복의 비결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감사’다. 감사할 만한 일에 감사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감사할 일이 전혀 아님에도 감사하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도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젓가락질을 배우듯 감사하는 법을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할 수 있는 지혜와 여유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부모나 국가를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에 비춰볼 때 식수 한 동이를 얻기 위해 뜨거운 태양 아래 몇 킬로를 오가야 하는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 종교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마저 보장 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다.
행복의 또 다른 비결은 ‘지족(知足)’이다. 자기 자신을 진정 행복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그것도 만족함을 아는 마음이다. 행복은 내용(내적 마음 상태)에 있되 형식(외부 조건)에 있지 않다. 흔히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남의 짐이 가벼워 보이지만 남이 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실제로는 저마다 자기가 짊어진 짐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고 느낀다. 게다가 어딘가에 행복의 지름길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지름길은 없다. 도로 가든 모로 가든 바른 마음을 가지고 바른 길을 가는 것에 만족할 일이다.
행복의 마지막 비결은 ‘희망’이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사람의 운명은 불가지(不可知)여서 언제 쪽박을 찰지 대박을 터뜨릴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희망이 있는 한,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고 지나간 과오나 실패를 거울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절망에 죽고 희망에 산다. 헛된 희망일지언정 희망 고문일지언정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오늘의 절망을 극복해 나간다.
인류의 미래에 관해 회의적인 시각들이 많다. 그러나 인류의 집단 지성은 문제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 그리고 공존과 번영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 외계 행성 탐사만 하더라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지만, 도전 그 자체만으로 인류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측면이 있다. 빌게이츠는 화성에 가는 것보다 지구상의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편이 낫다며 우주를 향한 일론 머스크의 열정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여하튼 두 사람 모두 희망의 아이콘으로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고 본다.
상처에서 새살이 돋는다. 새벽이 찾아오지 않는 밤은 없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시련도 그 끝은 있다. 삶이 버거워도 이런 반전의 묘미가 있어 그런 대로 견딜 만하다. 누구나 일생에 단 한 번 영접하는 2022년, 얼굴만이 아니라 허파까지 활짝 웃을 수 있는 날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