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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글

김장하던 날의 추억

by 책벌레아마따 2021. 12. 22.

김장하던 날의 추억

                                                                            

 김치를 제쳐놓고 한국의 음식 문화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다수의 한국인은 산해진미가 차려진 밥상도 김치가 빠지면 팥소 없는 찐빵으로 여긴다. 이를 뒷받침하듯 2001년 국제식품규격위원회는 한국이 김치 종주국임을 인정한 바 있다. 또한 2013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우리의 김치와 김장 문화가 등재되었다.

 

 한편, 김치 문화를 계승하고 김치의 우수성을 전파할 목적으로 2011김치 산업 진흥법이 제정되었으나 2020년 개정되면서 매년 1122일을 법정기념일인 김치의 날로 지정했다. 하나하나(11)의 소재가 모여 22가지의 효능을 발휘함을 뜻한다. 향후 김치의 국내외적 위상을 고려하여 품질 향상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철이 돌아왔다. 겨울을 나기 위한 하나의 통과 의례인 양, 배추통과 씨름하며 한바탕 북새통을 치르는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사먹는 김치가 대세인 요즘에도 김장 김치만은 직접 담그려는 주부들이 있어 김치 문화의 명맥이 유지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김장 시기는 단풍 시기와 마찬가지로 지역별 차이가 있다. 즉 단풍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순차적으로 물들어 가듯, 김장 시기 역시 강원 산간을 시작으로 하여 서울을 비롯한 중부를 거쳐 경상·전라로 남하한다.

 

 추억 속 김장하던 날의 풍경을 그려 보면, 집 안팎이 도떼기시장처럼 시끌벅적하던 기억이 맨 먼저 떠오른다. 집집마다 배추 일이백 포기는 기본이다 보니 배추를 쪼개어 소금에 절이는 과정부터 완성된 김치를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고 땅속에 저장하기까지 보통 23일 빨라도 12일이다. 이웃과의 협업이 아니면 결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다. 기껏해야 열 포기 남짓한 오늘의 김장은 예전에 비하면 소꿉놀이 수준이다.

 

 드디어 김장 개시 첫날, 아침 댓바람부터 배추 가르기와 소금 치기가 이어진다. 그새 귀때기가 떨어져 나갈 듯한 칼바람에 잔뜩 곱은 어머니의 손이 단풍잎만큼 빨개졌다. 낮 동안 잘 절여진 배추는 물에 깨끗이 헹군 뒤 도리뱅뱅처럼 너른 채반에 빙 둘러 얹어 밤새 물기를 뺀다. 이튿날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합세하여 일사불란하게 공동작업을 펼친다. 한나절 노력 봉사의 결과물로 무채고춧가루·풀죽젓갈·마늘생강··통깨 등을 함께 버무린 김칫소가 준비되면 다음에는 배춧잎 켜켜이 채워 넣는다. 겨우내 김치국수김치전김치만두김치찌개김칫국김치볶음밥으로 화려하게 변신할 겨울의 반 양식’, 김장김치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주부 9단들이 한자리에 모인 만큼 젓갈 종류나 양념 배합 등을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남의 김장에 새우젓 넣어라 멸치젓 넣어라, 훈수를 두는 것도 모자라 가벼운 실랑이도 벌어지지만 그 또한 사람 사는 맛이다. 김장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뜨끈한 동태탕배추속대김칫소를 곁들인 돼지수육 파티다. 품앗이 아주머니들과 그 집 아이들까지 한데 어우러져 먹고 웃고 노래하고 떠들다 보면 동짓달 짧은 하루해가 왠지 야속하게 느껴졌다.

 

 당시의 어머니들은 한 해 한 번도 성가신 김장을 몇 번씩 한 셈이다. 하지만 품을 빌려 썼으니 품 갚기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뿐 그걸 가지고 불평하는 일은 없었다. 근검절약이 미덕이던 시대라 물자를 절약하기 위한 아이디어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김장도 예외는 아니다. 그중 하나가 배추 절인 소금물을 얻어다 재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짠순이정신에 빛나는 알뜰주부들은 이웃집이 김장하면 소금물 본 김에 즉석에서 김장 날을 잡곤 했다.

 

 다양한 젓갈과 채소가 들어간 김장김치는 맛도 맛이려니와 영양학적으로도 손색이 없어서 찬거리 빈약한 겨울을 위해 제격이었다. 설령 재료나 양념이 부족하면 어떠랴. 이웃들의 손맛이 보태진 데다 따스한 까지 채워져서 그 시절의 김장김치는 그냥 맛있었다. 비록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김장독 뚜껑에 소복소복 흰 눈 쌓인 소담스러운 풍경이나 김장 품앗이 같은 아름다운 풍속은 한국인만의 전유물이다. 김치는 이래저래 한국인에게 있어 위안 음식(소울 푸드)’이 될 수밖에 없다.

 

 2021.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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