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의 기적을 소망하며
팽목항은 이제 온 국민의 뇌리 속에 비극과 눈물의 대명사로 각인되었다. 마을에 팽나무가 많아서 팽목항이라 불렸다는 그곳은 2014년 4월 16일 이전까지는 이름조차 생소하던 진도 끝자락 작은 연안항이다.
그날 팽목항 앞바다에 침몰한 것은 여객선 세월호만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를 발단으로 대한민국의 총체적 비리와 도덕적 해이가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한국인의 자존심과 국가 이미지도 함께 수장되었다.
선체 이상이 감지된 시점까지 소급하지 않더라도, 첫 조난 신고가 접수된 이후부터만이라도 초동대응이 원활했더라면 판도는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사고 관련자들의 비도덕적 판단과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탑승객들이 마지막 구조의 기회마저 박탈당해야 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분노하고 절망한다. ‘이동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에 따라, 안전봉에 의지한 채 하염없이 구조의 손길을 기다렸을 어린 학생들 생각을 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사고 발생 이튿날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실종자 생환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이번 사고가 진작부터 예견된 인재(人災)임을 입증하는 검은 커넥션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직무를 유기한 채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여 가장 먼저 사고 선박을 탈출한 선장과 선박직 선원들의 행위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면책되기 어렵다. 돈벌이에 급급해 기본적인 원칙들을 무시하고 무리한 선체 구조변경과 증톤(최대 적재량의 톤급 증가), 과적과 허술한 화물 결박 등을 자행한 해당 선사의 과실 또한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낱낱이 규명될 것을 기대한다.
그동안 안전사고가 터질 때마다 국민은 분노하고 정부는 사과를 되풀이해 왔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니 의욕을 앞세운 졸속의 땜질식 처방보다, 작은 것 하나라도 차근차근 정확하게 개선하려는 진정성 있는 노력이 요구된다.
국가건 시스템이건 사람이건 생각처럼 그리 쉽게 바뀌는 존재일 것 같으면, ‘씨랜드’ 홍역을 치른 즉시 재난구호 시스템이 견고하게 구축되었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작년 여름 안면도의 사설 해병대캠프에 참가한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의 희생이나 최근의 부산 외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된 리조트 사고 같은 것은 겪지 말았어야 했다. 만약 우리가 서해 페리호 사고를 통해 안전 불감증에 대한 진정한 교훈을 얻었더라면, 20년이 지난 오늘 세월호의 참극은 없었을 것이다. 재난에서 국민을 보호할 정부의 컨트롤 타워가 정상가동 되었더라면, 실종자 집계조차 오락가락하여 유가족들을 두 번 절망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실종자라도 더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려는 일념으로 칠흑 같은 바닷물로 주저 없이 뛰어드는 잠수사들의 살신성인의 정신,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구명조끼를 타인에게 양보한 거룩한 이타심, 팽목항을 지키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조건 없는 나눔의 정신 등 그나마 이러한 성숙한 시민의식들이 만신창이가 된 사고현장에서 아름다운 인간애를 꽃피우며 미래를 향한 가냘픈 희망의 두레박을 길어 올리고 있다. 온 국민이 이 나라 어느 고위관료나 기업가의 죽음보다도 더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면을 애달파하며 애도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순리를 역행한 이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으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되풀이되도록 놔둘 수는 없다.
이제 우리 마음을 추스르고 냉철한 이성으로 눈앞의 상황들을 직시하자. 사고가 터질 때만 반짝 각성효과를 갖는 우리의 안전의식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자. 어른들의 후안무치로 인해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슬픔과 분노를 넘어, 절망과 좌절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꿔 나가자. 이제 경제 개발 속도를 조금 늦추고 더디 가더라도 삶의 질을 생각할 때이다.
무사생환의 기적은 없지만, 세월호 참극을 대한민국 국가개조의 새로운 시작점이 되게 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먼저 사회 모든 분야를 투명하게 관리·감독할 수 있는 매뉴얼과 시스템을 마련하여 부정과 비리와 불신을 척결해야 한다. 국민 스스로 한국인이란 자긍심을 가지고, 세계를 향해 코리언임을 자랑스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떠나고 싶은 나라, 버리고 싶은 조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에도 우리가 팽목항의 경고를 간과하고 희생자들의 눈물을 쉽게 망각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오늘의 분노를 거룩한 분노로 승화시키고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기 위해 다시 한 번 국민의 역량을 집중하자. ‘2002 월드컵’ 당시 붉은 응원셔츠를 차려입고 온 나라를 붉게 물들이며, 한 마음 한 뜻으로 ‘대한민국’을 외쳐 세상을 놀라게 했던 우리가 아닌가. 지난 세기 후반의 경제 개혁이 한강의 기적이었다면, 이 땅 위에 선진화된 국민 의식과 국가 시스템을 정착시켜 기필코 팽목항의 기적을 이루어 내자.
2014. 5. 29.
어느덧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0주기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쓴 글을 오늘 다시 읽노라니 정말 온 국민이 너무도 황당한 일을 겪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날, 유명을 달리한 모든 이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빌어 본다. 유가족들의 아픔이 아직 진행형인 것이 매우 안타깝다. 두 번 다시 이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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