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분쟁이 조속히 종식되기를
‘생명이 위급한 응급 환자 외에 일반 진료는 제한되거나 장시간 지연될 수 있습니다’ 자구(字句)는 달라도 내용은 동일한 각 병원 응급실 진료 안내문의 예시다. 비상의료체계에 아무 문제없다는 정부의 해명이 무색하게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가 현실화되었다. 지난 추석 연휴, 92차례 전화로 이송 병원을 수소문하던 30대 여성 환자가 끝내 심정지로 사망했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던 의료 선진국에서 대체 무슨 일인가.
의대 신입생 증원에서 촉발된 의·정(醫政) 갈등이 결국 의료 파행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간 의료계는 집단 휴진, 집단 사직서 제출 등 단체 행동을 불사한 바 있다. 정부는 집단 이탈을 감행한 전공의들에게 현장 복귀를 독려했지만 이탈 행렬이 멈추지 않자 강공 모드를 가동했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 각지의 의과 대학에 2025학년도 입학 증원 인원을 배분 및 확정 발표하고, 공중보건의·군의관을 비상 진료에 투입한 것이다.
그럼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니 이번에는 의료계 달래기에 나섰다. 사직 전공의들의 복귀 여부와 상관없이 행정 처분을 철회하고, 의대생들의 집단 유급 사태에 대비한 ‘2024학년도 의과대학 학사 탄력 운영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그러나 유급을 막기 위해 학칙까지 바꾸겠다는 것은 원칙과 상식에 반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의대 교수들도 의학 교육과 의료인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여 임기응변식 졸속 대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입학 정원의 증원 철회에 대한 의료계의 입장은 강경하다. 의료계로서는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므로 정부가 이 문제에 보다 섬세하고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정부의 주장대로 사전에 의료계와 협의가 있었더라도 의료 개혁의 목적이나 방향 등의 구체적인 설명이 미흡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상호 간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일방적 통보로 인식되기 쉽다. 의료 개혁 구상을 서둘러 공표하느라 상대측이 충분히 납득할 때까지 협의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등한시한 대가를 지금 온 나라가 톡톡히 치루고 있다.
의료 사태의 발단이 된 정부의 미숙한 행정력에 대해서는 뭐라 언급할 의욕조차 나지 않는다. 더구나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에 식겁할 수밖에 없다. 정부 관계 당국자가 내린 중증과 경증의 정의를 살펴보면, ‘중증은 의식 불명이거나 본인이 스스로 뭘 할 수 없는 마비 상태, 경증은 열이 많이 나거나 배가 갑자기 아프거나 어디가 찢어져서 피가 많이 나는 상태’라 되어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파격적 신개념이다.
의료계 역시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중대 사안을 놓고 냉담한 태도로 일관한 터에, 집단 이기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를 바라서는 안 될 듯하다. 다만 전공의들이 수련의로 몸담았던 의료 현장을 떠나 전문의 행보를 접고 일반의가 되건 외국 병원에 취업하건 그것은 개인의 선택 영역이다. 전공의가 의사 인력의 핵심은 아니지만 의료 업무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으리라는 점도 이해한다. 그래도 자신이 돌보던 환자들을 불안과 위험에 직면케 한 일정 행위에 대해 일말의 도의적 책임마저 면책될 수는 없다. 게다가 ‘(환자가) 더 죽어야 정신 차린다’ 같은 패륜적인 막말은 가히 충격적이다.
금번 의료 정책은 ‘2000명’으로 상징될 법하다. 그런데 의료 개혁의 당위성에 대체로 동의하던 국민들마저 뜨악하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1년에 1000명씩 10년간 점진적 증원’ 등 선택지가 여럿 있었음에도, ‘정부 안을 거부하는 과학적 근거를 가져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의료계와 국민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안에 따라 타협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다. 그 이유는 법과 제도와 사람 모두 완벽하지 않아서다.
대한민국은 지금 의료 역사상 유례없는 의료 위기를 마주했다. 전공의들도 떠나고 전문의들도 떠나고 의대 교수들도 떠나고 의대생들도 수업을 거부하고 있다. 의료진 부족으로 인해 진료 축소, 수술 연기 등 의료 체계가 무너지고 의료 피해가 속출하는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의료 공백의 가장 큰 피해자는 환자다. 특히 중증응급환자들과 희귀질환자들은 생명의 위협마저 느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의사들이 기피하는 외과, 산부의과, 소아청소년과 같은 필수과들의 존폐마저 우려스럽다.
국민의 피로감은 임계점에 달했다. 환자는 물론 멀쩡한 사람도 생병이든 화병이든 생길 판이다. ‘의술은 인술’ ‘의료인의 직업윤리’라는 말로 사회적 책임을 상기시킬 의도는 없다. 다만 직업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다. 직업에 내재된 보람과 가치는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의료 분쟁이 한 해를 넘겨 해묵은 과제가 되지 않도록 의료인들의 대승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대들이 있어 가장 빛나는 곳은 바로 의료 현장, 환자 곁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2024. 12. 5.
'삶에 관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 (3) | 2024.11.07 |
---|---|
화성 출신과 금성 출신 (9) | 2024.10.26 |
와사보생의 가르침 (10) | 2024.10.14 |
군대 판타지 (4) | 2024.10.02 |
인생, 그 헛헛함에 대하여 (16) | 2024.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