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조급증
길가 공터에 노란 해바라기가 초가을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인 채 환하게 웃고 서 있다. 기다란 목을 늘어뜨린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모습은 언제라도 보는 이의 마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기다림 또는 그리움이다. 그런데 ‘기다림’ 하니까 갑자기 꽃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한국인의 기질 가운데 참을성 부족이 늘 국내외에서 회자된다. 사실 한국인의 조급증은 지금까지 국가 성장을 이끄는 동력원이기도 했다. 매사 시원시원하고 거침없고 바지런한 국민성 덕분에 이만큼 나라 살림이 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우리 사회의 병폐로 작용하여 곳곳에서 부작용을 일으키는 주범이 된 일면도 있다.
TV에 나온 전라북도 전주의 한 야식업체 직원이 하는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다. 음식 배달이 조금만 늦어도 고객이 불평하기를, ‘서울에서 음식을 만들어 오느냐, 놀다가 오느냐’ 한다는 것이다. 전주에서 서울이 어디라고 비유를 해도 그런 비유를 하는지 이만하면 조급증의 제왕이다. 외식을 할 때도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기 무섭게 음식을 주문하고는 이내 성화가 시작된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으려면 진득하니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건만, 우물가에서 숭늉 찾기 식으로 주문한 음식이 왜 안 나오느냐고 연신 재촉이다. 게다가 입천장이 홀라당 벗겨질 정도로 뜨거운 뚝배기 국물을 연신 호호 불어가며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듯하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는지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고픈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맞춤형 고객 서비스 총알택시가 인기리에 도로 위를 내달렸다. 하지만 30분 먼저 가려다 30년 먼저 황천길로 접어들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내가 아는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서울의 버스는 달리는 게 아니고 날아다닌다는 말을 듣고 민망하기 그지없던 적도 있다. 앞차가 조금만 꾸물거려도 뒤에서 빵빵 경적을 울려 대는 성질 급한 차 주인을 보고 있으면 비행기 시간이라도 놓치지 않고서야 저럴까 싶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어가 “사장님 때리지 마세요,”와 ‘빨리빨리’라고 하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인가. 건설 현장에서도 공기를 앞당기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결국 구조적으로 부실 공사가 될 수밖에 없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다른 사람이야 타든 말든 그새를 못 기다리고 닫힘 버튼을 연속으로 누르는 것이 흔히 목격된다. 생활 속에서 단 ‘5분간의 기다림’만 실천해도 삶이 한결 여유로워질 것 같은데 그게 그리 간단치 않은 모양이다. 각종 안전사고는 매사 서두르는 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음을 알아야 한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은 결코 한 순간에 뚝딱 만들어질 수 없고 오랜 발효와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오랜 시간의 기다림 속에서 제대로 된 음식도 나오고 제대로 된 물건도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의 전통 된장이나 간장이 좋은 예다. 메주를 띄우고 소금물에 삭히는 과정들을 바람과 햇빛과 시간에 맡겨 두고, 마침내 우리의 밥상에 오르기까지 실로 기다림과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곰삭은 음식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풍부한 유산균이 우리 몸을 살릴 수밖에 없다.
목기를 만드는 것도 기다림의 연속이다. 나무를 밥그릇이나 국그릇 형태로 깎아 뒤틀림이 없도록 2-3년을 자연건조 시킨다. 백골이라 부르는 이 천연 상태의 나무그릇에 옻을 바르고 말리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더할 나위 없이 지루한 오랜 작업 끝에 마침내 천 년이 가는 옻칠 목기가 장인의 투박한 손끝에서 탄생된다. 빨리 피는 꽃이 있으면 늦게 피는 꽃도 있듯 사람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말도 어눌한 세발배기에게 조기교육을 시킨다며 조급증부터 내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일이건 모두 때가 있고 기다림이 필요하다. 기다림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미덕이다.
2014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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