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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글

광복절 아침의 환희

by 책벌레아마따 2014. 5. 17.

광복절 아침의 환희

                                                                  1998년 8월

 

  애가 없어졌어.”

 

 사색이 된 얼굴로 현관문을 들어서는 남편을 보는 순간 심장이 그대로 멎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아빠 손을 잡고 좋다고 소리 지르며 나갔기에 당연히 밖에서 잘 놀고 있겠거니 추호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때마침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광복절 특집 프로그램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던 차에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까?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자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로 직행하였는데, 아이가 혼자서 미끄럼도 타고 모래장난도 하면서 신이 났더랍니다. 아이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슬 무료해진 남편은 벤치에 앉아서 신문을 읽기 시작하였고,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집 밖으로 놀러나간 지 불과 30여 분만에 벌어진 긴급 상황이었습니다.

 

 남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단지 이곳저곳을 이리저리 훑어보았지만 아이는 끝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관리사무소에 가서 미아발생 방송을 부탁하고 잠시 기다리노라니, 국경일 아침 발생한 황당한 소식에 이웃들이 하나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집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이웃들과 함께 단지 밖으로 아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혹시 유괴라도? 아니면 교통사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정신이 혼미해질 듯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기에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어떤 부모에겐들 자식이 소중하지 않겠습니까만 우리 아이 역시 내게는 우주와도 맞바꿀 수 없는 귀하디귀한 존재입니다. 일과 학업에서 맛보는 달콤한 성취감에 취해 결혼은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다 적령기를 넘겨 면사포를 쓰게 되었고 그러고서 얻은 아이입니다.

 

 흔히 결혼을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혼인을 통해 한 남자의 아내가 된 것만큼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사실이야말로,  나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크나큰 의미입니다. 착하고 슬기로운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 아이가 태어났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던 터였습니다.

 

 신생아실 앞에서 아이와의 첫 만남을 기다리던 때의 설렘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아이가 바뀔지도 모른다며 남편이 이제 막 엄마 탯줄에서 떨어져 나온 핏덩어리 손톱에 발라 놓은 매니큐어의 붉은 빛깔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백일이 지나고 돌이 다되도록 밤낮이 바뀌어 새벽 한두 시까지 보채는 아이를 안고 업고 하다 보면 몸은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새근새근 잠든 아가 얼굴에 배냇짓인지 뭔지 모를 고운 미소가 번지는 그 순간, 모든 육체적 고통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미 가슴은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기쁨들로 넘쳤습니다.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밀면서 집 앞 야산 밑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노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다 엄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의 만족스러운 아가의 미소가, !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이 어미를 어미답게 만들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나눈 모든 시간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들의 시간 속에 함께 하는 모든 사물과 사건에 대한 추억들, 이를테면 여름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나지막한 속삭임과 길가의 가로등 불빛을 사랑합니다. 소나무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는 솔바람이며 길섶에 핀 작은 꽃들을 사랑합니다. 나의 아가와 함께 보고 듣고 느꼈던 이 모든 삼라만상을 지어내신 창조주께 얼마나 또 얼마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앞만 보며 살아왔던 나로 하여금 삶의 궤도 수정을 단행토록 한 이 아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어미의 스승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이의 일생에 있어 엄마 손이 가장 필요한 시기는 바로 이때다 싶어, 나의 모든 꿈을 한 순간에 접고 전업주부로 돌아서면서도 한 점의 후회도 아쉬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아이가 내 눈앞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 아이가 없으면 아마도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을 것입니다. 살아도 죽은 목숨일 것입니다. ‘아이를 제발 어미 품으로 되돌려 주십사간절히 기도하면서, 아이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반쯤 넋이 나간 채 얼마 동안 거리를 헤매었을까요.

 

 경찰서에 미아발생 신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기에 집으로 돌아와 신고전화를 막 끝낸 때였습니다. 밖에서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인성이 찾았다!”라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맨발로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박박 깍은 머리에 웃통은 벗은 채 반바지만을 걸친 아이가, 저만치 동네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로 갑자기 눈앞이 희뿌옇게 변해, 그토록 보고 싶던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한테 달려가지도 못하고 서 있지도 못하고 그만 나는 제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박장대소 소리가 단지 안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워 보지 않고 사랑의 실체에 대해 논하는 것은 공연한 말장난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의 어버이가 되어 보고 난 후라야 비로소, 인간과 신 양쪽 모두의 사랑의 속성이 깨달아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내리사랑이야말로 사랑의 시작이며 완성입니다.

 

 51회 광복절 감격의 아침, 대한민국 만세! 무사 귀환한 아들 녀석 만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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