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떠나가네
해마다 겨울이 다가오면 기상청에서 발표하는 동절기 기상 전망에 관심이 쏠린다. 이번 겨울의 경우 기온이 평년 수준이거나 다소 낮을 것으로 관측되었다.
한반도 겨울의 매서움은 북극 한파에 달려 있다. 시베리아에서 발달한 차가운 대륙성 고기압이 남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한파를 몰고 오기 때문이다. 특히 섣달과 이듬해 정월은 동장군이 연중 최고조로 기승을 부리는 때인 만큼 한파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방한 대책을 세워 두어야 한다.
근래 들어 온난화의 영향인지 기록적인 강추위는 드물다. 날씨 패턴 역시 ‘삼한사온’이 뚜렷하던 예전과 다소 차이가 있다. 올겨울에는 대략 일주일 간격으로 날씨가 추웠다 풀렸다 반복되는 양상이 나타난 듯하다. 그런데 추위는 둘째 치고 미세먼지로 인한 대기질 상태가 심상치 않다. 날이 추우면 공기가 맑다가도 날이 풀리면 어김없이 탁해지는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한파주의보' ‘한파경보’라는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지만 오염된 공기를 마시느니 차라리 추운 게 나을 성싶다.
겨울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꼽는다면 흰 눈 내리는 풍경이 단연 으뜸이다. 눈은 얼음의 결정체다. 한반도 공기가 따뜻한 상태에서 북쪽으로부터 찬 공기가 남하하면 눈구름을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해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붙어 땅 위로 떨어지면 그게 바로 눈이다. 그런데 눈의 결정체를 현미경으로 촬영한 사진을 볼 때마다 어찌나 영롱하고 아름다운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눈을 가리키는 호칭 역시 정감 어린 표현들이 많다. 예를 들어 겨울 초입에 살살 내리는 ‘풋눈’, 밤사이에 남몰래 내리는 ‘도둑눈’, 비가 섞이지 않은 ‘마른눈’, 비가 섞인 ‘진눈깨비’, 빗방울이 갑자기 얼어 쌀알 모양으로 떨어지는 ‘싸락눈’, 가늘고 성긴 ‘포슬눈’, 목화솜처럼 굵고 탐스러운 ‘함박눈’, 쌀가루처럼 고운 ‘가루눈’, 소낙비처럼 세차게 내리다가 이내 그치는 ‘소낙눈’, 발자국이 겨우 비칠 정도의 ‘자국눈’ 등이다.
겨울은 설핏 차갑고 을씨년스럽고 메마른 듯 보이나 의외로 낭만적인 계절이다. 첫눈 내리는 날 덕수궁 돌담길은 ‘눈맞이’ 인파로 북적댄다.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소복소복 내려앉은 숲길을 뽀드득뽀드득 소리 내며 걷는 겨울 산행은 너무나 환상적이다. 요즘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한때는 붕어빵‧국화빵‧군밤‧군고구마 같은 길거리표 간식들이 차가운 겨울에 온기를 채워 주곤 했다. 가스등을 밝힌 길거리 포장마차 천막지에, 퇴근길 홀로 꼼장어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남자의 실루엣이 일렁거린다. 이는 왠지 슬픈 낭만이다.
겨울에 추우면 이듬해 병이 적다거나,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풍년 든다는 속설이 있다. 다만 과학적인 근거를 따지기 전에 모두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수도관‧보일러‧계량기 동파 사고의 씁쓸한 기억을 불러올 터이니 말이다. 또한 영하권 날씨 속에서 눈이 쌓인 도로는 밤새 얼어붙어 위험한 빙판길로 변하기 십상이다. 겨울철에 골절상 환자가 부쩍 증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폭설이나 대설이 내리면 제설 차량의 활약이 돋보이지만 출근길과 퇴근길의 교통대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24절기의 맨 마지막인 대한이 지났으니 겨울도 이제 막바지 단계인 것은 확실하나 안심은 금물이다. 입춘 추위에 장독대가 깨진다고 하듯 방심하다가는 기습 한파에 허를 찔릴 수 있다. 그래도 얼음장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나뭇가지 끝마다 꽃망울이 봉긋하다. 자연이 위대하다 칭송해 마지않는 것은, 겨울 한철 숨죽이고 있던 삼라만상이언만 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기를 되찾고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겨우내 함박눈은커녕 눈가루 한 번 구경하기 힘든 이곳에서 겨울 이야기를 화제에 올려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거기다 음력설을 쇠느라 경황이 없는 우리를 등지고 무심한 겨울이 슬슬 떠날 채비를 하는 모습에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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