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조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마찰과 대립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가족이나 친인척 간 갈등 양상이 남남 간에 비해 한층 복잡하고 심각한 경우가 있다. 아마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없음에 따른 현상이 아닐까 여겨진다.
비록 가족 간이라도 허물없다는 핑계를 들어 예의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 평범한 원칙을 간과한 대가는 의외로 크다. 가정 파괴는 죽음이나 화재보다 말다툼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한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 부주의한 행동 하나가 갈등과 반목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줄 거라 믿은 가족에게서 받은 비난과 질타는 자칫 마음의 상처로 남기 쉽다. 게다가 상대방이 그런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기억하더라도 얼렁뚱땅 눙치려 든다면 앙금이 쌓일 수밖에 없다.
이미 사회 문제로 고착화된 ‘명절 증후군’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명절은 평소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던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안부도 확인할 겸 친족의 정을 나눌 좋은 기회다. 그러나 웃음꽃이 만발하는 기분 좋은 만남이 아니라 피차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기는 부담스러운 만남이 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집안 사정에 서로 훤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훈수를 둔다거나 아니면 서로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화근이다. 아무리 막역하게 지내는 친인척일지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갈등은 또 다른 갈등으로 번진다.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원인을 명확히 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하지만 양측 모두 갈등의 원인 제공자로 상대편을 지목한 채 본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무엇보다 타인의 입장은 아랑곳없이 자기 생각과 주장만을 고집함으로써 갈등의 빌미가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아울러 가급적 평정심을 유지하여 애초 시시비비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공부자는 이르길, ‘과분한 칭찬을 받음은 군자가 갈 바가 아니고 무근한 비난을 받음이 군자가 갈 바이니 과분한 칭찬보다 근거 없는 비난이 낫다’라고 했다. 이 같은 성현의 충고를 각자 마음에 새기고 세상의 상찬이나 비난에 의연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사람 사이의 갈등도 점차 수그러들 거라 기대한다.
사실 일생 동안 누군가에게 단 한 번의 상처도 주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웬만하면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는 아량이 필요하다. 또한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의 허물부터 살필 일이다. 상대방에게 손가락질하는 순간, 검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손가락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인간에게 단 하나의 의무만을 지운다면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이 빚어내는 마법과 같은 일들을 목격한다. 사랑은 평범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랑을 실천하는 최상의 방법은 타인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며,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인 때문이다.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고, 용서받고 싶다면 용서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그로 인해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 된 것은 사필귀정이다.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그 아픔과 상처를 잊지 못한다. 죄의식의 굴레에 갇힌 채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허물을 참회한 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과를 종용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본다. 자발적이 아닌 강요에 의한 사과는 하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 유쾌할 리 없다.
결코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해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다만 그 사람이 철저한 자기 성찰의 토대 위에서 명징한 언어로 진심어린 사과를 표명한다면, 용서받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 요건을 충족한 것으로 판단할 만하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다.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더 용서하며 살자.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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