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그 헛헛함에 대하여
영화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프랑스를 넘어 세기적 미남 배우의 대명사로 통하는 알랭 들롱의 이름만큼은 귀에 설지 않으리라 믿는다.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누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그가 자녀들과 반려견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난 8월 18일 88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다고 외신은 전한다.
알랭 들롱은 1957년 은막에 데뷔한 뒤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1960)’에서 ‘톰 리플리’를 열연하고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영화가 흥행하자 상상 속의 허구 세계를 현실과 혼동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 ‘리플리 증후군’이 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영화계에 몸담는 동안 9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그때마다 스크린 가득 우수에 젖은 얼굴로 전 세계의 여심을 사로잡았다. 암흑가의 범죄를 다룬 느와르 영화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그러나 2017년 영화계를 떠난 이후로는 대중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던 중 은퇴 후 최초로 모 시사 주간지에 의해 근황이 보도되면서 팬들의 놀라움을 샀다. 지난날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며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가 프랑스 중부 루아레 지방의 대저택에서 홀로 쓸쓸히 노년을 보내는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죽음이다.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다’며 초연한 태도를 지었다. 반려견 '루보'와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도 했다.
그가 다시 뉴스 메이커가 된 것은 2019년 뇌졸중 수술을 받고 스위스에 거주하는 사실이 공개되면서다. 스위스 행을 결행한 이유가 생의 마지막 선택을 염두에 둔 때문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그가 평소 ‘안락사는 가장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소신을 밝힌 터라 단순히 의혹으로만 치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스위스는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죽을 권리’를 보장하는 세계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안락사는 적극적 방식과 소극적 방식으로 나뉜다. 전자는 직접 약물을 주입하는 방식이다. 후자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부착,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 생명 연장을 위한 일체의 치료를 중단하는 방식이다. 몇 해 전부터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존엄사의 경우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된다. 소수의 안락사 지지자들은 인간으로서 마지막 존엄과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심신의 고통을 스스로 감내할 수 없는 이들이 안락사를 현실적 대안으로 여기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개인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실로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안락사를 본다면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이라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해하거나 포기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어쩌면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간절히 바란 단 하나의 소망은 바로 오늘이 아니었을까 한다.
최근에 알랭 들롱을 둘러싼 잡음이 발생했다.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2019년부터 한집에 기거하며 건강 회복을 도운 것으로 알려진 동거녀를 자녀들이 고소한 사건이다. 자녀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일본인 여성이 아버지를 정신적으로 학대했다고 한다. 얼굴 하나로 모든 게 용서된다는 전설적 배우 알랭 들롱, 한때는 세상의 인기와 부를 걸머쥐었지만 인생 말년은 그리 장밋빛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알랭 들롱의 고혹적인 눈빛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전 세계 올드팬들의 바람은 오직 한 가지였을 것이다. 불미스러운 사건 따위에 더 이상 연루되지 말고, 부디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의 인생이 잘 갈무리되었으면 하는 그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래도 안락사가 아닌 자연사를 받아들인 점은 매우 다행스럽다.
삶이 있는 곳에 죽음은 필연적으로 함께한다. 죽음은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기에 여하한 경우에도 묵묵히 삶과 죽음을 견뎌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의 속성이 원래 그토록 비정한 것을 어쩌랴.
202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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