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물씬한 ‘카모메 식당’
좋은 영화란 어떤 영화인가. 관객의 마음에 온기를 주고, 시간이 흘러도 여운이 남고, 두세 번을 봐도 처음인 듯 새롭고, 요란한 홍보 없이도 알음알음으로 알려진 영화라면 그 기준을 충족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리 없이 강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카모메 식당(원제 ’かもめ食堂‘)’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2006년 작품이다. 핀란드 헬싱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은 소시민들의 담백한 일상이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함으로 맛깔나게 묘사되었다. 요리에 관해 나름의 철학과 열정을 지닌 식당 여주인 ‘사치에’ 역의 고바야시 사토미의 농익은 연기가 일품이다. 보조개 팬 얼굴에 번지는 선한 미소와 단아한 용모가 매력적인 그녀는 일본 내 배우자감 투표에서 1순위로 낙점되기도 했다.
38세의 독신 여성 ‘사치에’는 모국을 떠나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로 이주한 뒤 항구 근처 한적한 동네에 ‘루오칼라 로끼(식당 갈매기)’라는 이름의 아담한 식당을 차린다. 일본식 주먹밥인 ‘오니기리’와 커피가 주 메뉴이지만, 사실 그녀에게는 일본 가정식의 따뜻함과 소박함을 현지인들에게 널리 소개하고 싶은 꿈이 있다. 과연 낯설고 먼 이국땅에서 그녀의 진심이 통할지 영화의 도입부부터 관객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린다.
그나저나 개업하고 한 달 남짓 손님이라곤 일본 만화 광팬인 ‘토미’가 유일하다. 그마저도 개업 첫 손님에겐 평생 무료 커피를 제공한다고 약속한 터라 돈이 안 되는 손님이다. 허구한 날 파리 날리는 식당을 보면 관객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지경인데, 정작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아버지한테 배운 무술 체조와 수영으로 체력을 다지며 씩씩하게 버텨 나간다. 게다가 텅 빈 식당 주방에 홀로 틀어박혀 노상 뭔가를 지지고 볶느라 분주하다.
그즈음 서점에 갔다가 핀란드로 혼자 여행을 떠나온 ‘미도리(카타키리 하이리 분)’를 만나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게 된다. ‘미도리’는 세계지도를 눈앞에 펼쳐 놓고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콕 찍은 핀란드를 여행의 목적지로 정할 만큼 꽤나 엉뚱한 여성이다. 그래도 ‘사치에’의 식당일만은 성심성의껏 거드는데, 손맛 야무지고 의욕 충만한 그녀가 식당 영업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모습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보다 못한 어느 날 ‘미도리’는 시장에 나가 식재료를 잔뜩 사들고 돌아온다. 곧바로 두 사람은 현지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메뉴 개발에 매달리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그런데 시나몬 롤(계피 빵)은 왠지 느낌이 좋다. 예상대로 빵 굽는 냄새가 퍼져 나가자 하나둘 손님이 모여든다. 시나몬 롤을 찾던 손님들은 어느새 일본 음식에도 서서히 관심을 보인다.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은 중년의 ‘마사코(모타이 마사코 분)’다. ‘에어 기타 쇼(기타 없이 연주 시늉만 하는 대회)’ ‘아내 둘러매고 달리기 대회’ 등 핀란드 문화를 TV로 접하고 핀란드인의 여유로운 삶을 동경하던 차에, 20년간 병석에 있던 노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주저 없이 핀란드 여행길에 올랐다. 그런데 헬싱키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여행 가방을 분실하는 난감한 상황에서 찾은 곳이 갈매기 식당이다. 이후 분실물을 되찾은 ‘마사코’ 역시 당분간 식당일에 합류하기로 뜻을 모으면서 일본 여성 3인방의 유쾌한 핀란드 생활을 예고한다.
그녀들에게서 이방인으로서의 이질감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조붓한 식당이 손님들로 북적대기 시작했으니 살림살이도 차차 필 것이다. 극 중에는 현지인이 여럿 등장한다. 그중에 집 나간 남편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린 ‘리사’, 늘 함께 붙어 다니며 낯선 동양인의 식당을 기웃대다가 나중에는 단골손님이 된 중년 여성 3인방도 있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지구촌 어디든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우리에게 생소한 북유럽의 이국적 풍물이다. 석양에 물든 발트 해변, 갈매기가 나는 작은 항구의 풍경이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 좌판에 과채와 생선 등이 즐비한 재래시장도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데 한몫 톡톡히 한다. 백야의 나라 핀란드의 청정 자연을 스크린으로나마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숲은 핀란드인의 자부심이라 일컬어질 만하다. 영화 촬영은 실제로 시나몬 롤을 파는 헬싱키의 ‘카하빌라 수오미(카페 핀란드)’에서 진행되었다.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듯싶은 이 영화는 거액의 제작비를 쏟아붓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참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제대로 입증했다고 본다.
2024.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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