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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글

고베의 추억

by 책벌레아마따 2013. 3. 12.

                                                  고베의 추억

 

                                                                                               2012년 1월 15일

 

 

  그날의 참극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1995117일 오전 54652초 일본 효고현 고베神戶시에서 리히터 규모 7.3의 강진이 발생했다. 그 결과 고베시 반경 100km 이내의 주택과 공장을 비롯해 철도·통신·고속도로와 같은 사회기간시설이 처참하게 붕괴되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대재앙이다. 지진이 다반사인 일본이라 해도 도쿄를 포함한 관동지방과 달리 관서지방은 이전에 큰 지진을 경험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물질적 피해는 차치하고 시민들은 걷잡을 수 없는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사고 당일 긴급뉴스로 이 소식을 접한 후 하루 종일 전화통에 매달렸지만 한동안은 통신마저 두절되었다. 마침내 전화 연결이 되고 속속 들려오는 비보에 머리가 둔기로 맞은 듯 멍해졌다. 그리고 그 곳에 남겨 둔 나의 흔적과 추억도 함께 산산이 조각나 버린 듯한 아픔을 느꼈다.

 

 고베는 내 인생에 있어 나와 결코 유리될 수 없는 도시이다.

 전차 안에서 말을 걸어온 어느 남성이 한국 유학생이라는 소리를 듣더니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는 이내 남조선이냐, 북조선이냐'를 따졌다. 그 정도로 1980년대 일본 사회는 과거 자신들의 속국이었던 한국에 대해 여전히 차별의식이 지배적이었고 아예 무지했다.

 

 그러나 풍요 일색 가운데에도 빈곤이 숨어 있었고, 얼핏 건조하게만 보이는 도시의 속살은 뜻밖에 사람의 정으로 흥건했다. 특히 나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혈육 이상의 애정을 보여 주신 몇몇과 아무런 편견 없이 나를 수용해 준 다수의 지인들은 뜻밖의 주님의 선물이었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자연 풍광은 기본이고, ‘백만 불짜리 야경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야간 조명으로 현란한 밤 풍경은 덤이라 불러 좋을 고베였다. 긴 해안선을 따라 흔들리듯 달리는 전철 안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면 바다는 매번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바다 표면이 황금빛으로 출렁이면 내 안의 열정도 덩달아 끓어올랐다. 때로는 반짝이는 하얀 은비늘을 가진 거대한 한 마리 물고기가 누워 있는 듯했다. 짙푸른 코발트빛 융단을 깔아 놓은 듯 눈이 시릴 때도 있었다. 그리고 파도는 늘 하고픈 말이라도 있는 듯 와그르 달려왔다가 내 가슴에 눈부신 하얀 포말만을 부려 놓고 그대로 달아났다,

 

 고베의 자부심 록코산,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비너스 브릿지, 고베항의 상징인 고베 타워, 유럽풍의 건물과 정원이 이채로운 이진칸, 차이나타운이 있어 늘 북새통을 이루던 모토마치, 주말이면 단골로 드나들던 고베중앙도서관, 연말에 헨델의 메시아공연을 감상하기도 했던 고베문화홀, 중심가인 산노미야, 사계절 내내 서로 다투는 듯 아름다운 스마와 타루미와 마이코의 해변. 어디 한 군데 쉽사리 내 기억에서 도려내지 못할 정겨운 공간들이다.

 

 게다가 고베는 빵과 와인과 소고기와 구두의 도시라 일컬어진다. 정말이지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매력 만점의 도시이다. 그러니 내 어찌, 유학생 신분에 더하여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책임과 사명감에 부단히 근신했던 청춘의 푸른 한 자락이 녹아 있는 고베를 잊을 수 잊겠는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해결해야 할 현안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다. 앞으로도 어쩌면 두 나라는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떠한 위기의 순간이 올지라도 이웃 섬나라 역시 우리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만은 우리 모두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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