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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글

인생의 오후에 서서

by 책벌레아마따 2013. 3. 21.

인생의 오후에 서서

                                                                                                                         

 십 년 전쯤이다.

 

 결혼 후 처음으로 어렵사리 남편에게 휴가를 얻었다. 성북동 어느 산사에서 마련한 여름 수련회에 참가하고 싶어서였다. 맑고 향기로우신 법정 스님이 회주로 계셨던 그 절에서 며칠을 나기 위해 바랑 아닌 배낭을 메고 드디어 나는 출가(?)했다.

 

 수련 기간 내내 묵언 수행이 이어졌다. 지난날 삶에 대한 성찰의 시간으로 이끌려 가는 침묵의 과정이었다. 그동안 가슴 속에 묵혀 두었던 자연인으로서의 신앙인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본격적인 내면으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그 나의 육신은 결국 흙으로 돌아갈 한 줌 흙덩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자각했다. 바라고 구하는 것에 급급했던 나의 통속적인 삶의 모습들이 진부하게 여겨졌다.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교과서적인 지식들 역시 창백하게만 느껴졌다. 세상 속에서 신봉하던 신념과 가치들이 차례로 허물어져 내렸다.

 

 대신에 발우에 옮겨 담은 두세 가지 찬과 몇 술의 밥이 전부인 공양 예절은 너무도 귀하게 느껴졌다. ‘이 밥이 어떻게 나에게로 왔는고한 숟가락씩 넘길 때마다 목구멍이 아팠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좌복에 다리를 틀고 앉아 코와 입으로 들락날락거리는 숨에 집중했다. 그리고 숨 안에서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실재를 만났다. 히브리어로 영과 숨과 바람은 모두 같은 단어인 루아라고 한다는데, 과연 깃털처럼 가벼우신 성령님께서 나의 온 몸과 마음을 감싸고 계셨다.

 

 법당 밖에선 싱그러운 녹음이 한창 생명의 열기를 뿜어내며 여름에 화답하고 있었다. 작열하는 7월의 태양 덕분에 한층 눈부신 파란 하늘은 법당 앞에 놓인 하얀 고무신과 앙상블을 이루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산사의 고즈넉함을 깨뜨리며 울려 퍼지는 범종의 청아한 소리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경건함이 배어 있었다.

 

 어쩌면 흔하고 어쩌면 당연한 그 모든 풍경들이 나에게 넉넉한 위로와 평화의 메시지를 쉼 없이 보내고 있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도량 마당 한 귀퉁이에서 제 자리를 얌전히 지키어 핀 이름 모를 들꽃에게도, 무심한 듯 울어대는 매미에게도 내 마음이 활짝 벌어졌다. 그리고 마음 안 저 깊은 곳에서부터 연민이 솟았다.

 

 그날 그 체험은 내 안의 를 만나고 내 안의 하느님을 만나는 일대 사고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것으로 내 인생의 오전은 끝이 났다.

 

 인생의 오전이 끝났다고 해서 그 시간들이 영 잊힌 것은 아니고, 어린 시절 홍역 할 때 핀 열꽃처럼 더러는 그립다. 원고지 빈칸을 메우느라 끙끙 앓던 수많은 불면의 밤들과 주일학교 중고등부 아이들과 한 목소리로 주님을 노래하던 수많은 낮들이 켜켜이 쌓여 내 청춘이 되었으니까.

 

 시설에 머무는 심신장애 친구들과 부모 잃은 꼬마들에게 맛난 걸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욕심에 질척거리는 재래시장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하나도 힘든 줄 몰랐었다. 그러나 넘치는 신념과 젊은 패기로 인해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은 아니었다고 뒤늦게 반성해 본다. 여하튼 또래 젊음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서성대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흔히 말하는 세상 즐거움은 잘 모른 채 막이 내려진 반 토막의 청춘이었다.

 

 어느덧 나는 인생의 오후를 시작했다.

 이제 남은 시간을 제대로 마무리 짓고 싶다. 그러자면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을 바람처럼 흘려보내며,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나 누운 풀처럼 겸손해질 일이다. 세상 것에 탐닉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스러질 화톳불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세상의 잣대가 불완전한 속성을 지닌 것임을 깨달아, 나의 육신 60조 세포를 디자인하신 주님의 잣대에 따라 살아가고 싶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사랑의 의무를 짊어진 피조물로 창조되었다. 그러니 나도 주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심부름꾼으로 둘레에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내 인생의 오후는 어느 비 개인 날의 오후처럼 밝고 싱그러운 햇살이 넘쳐 나면 좋겠다. 허기진 삶의 그늘 속에서도 사랑과 기쁨과 고요함과 같은 내 안의 순수가 끝내 말라붙지 않기를 바란다. 언제 어떻게 부르심을 받을지 알 수 없는 날들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긴 잠에 들어갈 수 있게 하루하루를 되짚어 보아야 하리라. 긴 잠은 영원으로 향하는 통로임을 기억한다면 죽음도 그다지 두려운 존재는 아닐 것이다.

 

 순간에서 영원을 살 수 없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천국의 삶을 살 수 없다면 그 어디에도 천국은 없다는 것을 이제 비로소 가슴으로 알았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 갈라디아서 2;20

 

 

* 회주 : 선원이 없는 절의 최고 어른이며 절의 창건주를 말하기도 함. 회주의 상좌 (제자)가 주지를 맡기도 함.

 발우 : 바루라고도 하며, 승려들의 개인용 밥그릇을 말함.

 공양 : 절에서 하는 식사

 좌복 : 법당 내에서 사용하는 방석

 도량 ; 사찰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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