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고로, 미안코로’
2013년11월 28일
홀로 산길을 돌아내려와 모퉁이를 벗어난 그 때였다.
저만치 앞서 손수레를 끌고 가는 어르신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부터는 계속 내리막길이라 자칫 잔뜩 짐을 실은 손수레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불상사라도 벌어지면, ‘아차’ 하는 사이에 위험천만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한달음에 할머니 쪽으로 달려가 손수레 손잡이를 낚아채었다.
손수레의 무게는 내가 감당하기에도 만만치 않았다. 밑으로 저절로 굴러가려는 손수레를 힘으로 저지하려니 어깨와 허리가 빠지는 듯 했다. 그런데 정작 할머니는 나의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너무도 느긋하고 태연했다. 오히려 왜 그리 수선을 피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땀방울 맺힌 내 얼굴을 바라보셨다.
겨우 고갯길을 내려와 어느 정도 평탄한 길에 이르자 할머니는 길가 풀섶에 털썩 주저앉으셨다. 그리고는 신발을 벗어 거꾸로 들고 흙을 털어내시면서 “고맙고로, 미안코로.”라는 말을 연거푸 되뇌신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보따리도 하나둘씩 풀어 놓으셨다. 80이 넘는 연세에 평생 논밭 일을 하시며 자식들을 키우셨다고 한다. 평생 몸에 밴 것이 농사일이라 나이를 드셔도 손에서 놓지를 못하니, 부산과 서울에 흩어져 있는 자손들은 고향에 홀로 남은 어머니 걱정뿐이란다. 노모가 밤새 안녕하신지 아침마다 확인전화가 걸려온다며 자랑하셨다.
“천하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다 소용없니라.” 몸이 제일이니 제발 건강하라고 내게도 신신당부 하신다. 황금만능이다 물질만능이다 하여 돈이 우상인 현대인들이 아닌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인륜마저 저버리는 흉흉한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노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이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과연 학교 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은 적 없는 할머니의 지혜가 이토록 웅숭깊을 줄은 몰랐다.
할머니는 오늘 산길에서 우연히 만난 길손에게,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을 명쾌하게 들려 주셨다. 아니 온몸으로 보여 주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욕을 삼가고 건강을 돌보며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메시지이다.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 사는 세상이 한결 살맛나지 않겠는가. 할머니 댁까지 손수레를 운반해 드리고 싶었지만 부득불 혼자 끌고 가신다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손수레를 넘겨 드렸다. 집으로 오는 길 내내, ‘할머니 도서관’이 오래오래 이 땅 위에 건재하시기를 염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