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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문의 아들에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by 책벌레아마따 2015. 11. 1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151113

 

 오늘은 종일 비가 올 모양이구나. 요즘 은근히 비가 잦네. 가뭄으로 고생하는 지역에서는 정말 단비겠다. 엄마는 요즘에는 비가 별로다. 마음이 자꾸 울적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야. 그래도 비가 반가운 사람들이 있다면 당연히 참아야지. 비야, 많이많이 쏟아져다오!

 

 어제는 수능 한파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화창하고 포근한 것이 네가 시험 볼 때와 같았어. 시험은 끝났지만 모든 수험생과 가족들의 마음고생이 다 끝난 것은 아닐 거야. 수시 합격이 결정된 학생들은 제외하고, 너처럼 정시 입학을 하는 경우에는 이제부터 아마 피를 말리게 될 거다.

 

 네가 그렇게 한의대에 진학하여 동양 의학과 철학 등을 깊이 공부하고 싶어 했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기자 평생 엄마 주치의가 되어 주고자 하는 마음도 많이 작용했음을 알기에 너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런데 학교와 아빠의 강력한 추천으로 서울대로 진로를 바꾸어야 했을 때는 많이 속상했지? 엄마는 네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서울대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입학사정관제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탐색을 마친 아빠가 내린 결론은, 너에게 잘 맞는 학교라는 확신이 들더라는 거야. 너 때만 해도 입학사정관제 초창기라 용어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정보는 더군다나 구하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아빠가 직접 학교 홈페이지를 방문해 몇날 며칠을 파고들었고 입학 담당자와 몇 차례 통화까지 했다. 다시 말해 입학사정관제라는 제도를 믿고 너의 진로 변경을 강력히 희망했던 거야.

 

 뒤이어 엄마도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니 너를 위한 맞춤형 제도라는 판단이 들었다. 학문의 통섭을 이루기에 최적화된 너의 재능 등을 생각할 때 그만 하면 너를 맡겨도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엄마도 최종적으로 동의하게 되었지. 학교에서는 고1때부터 너를 서울대로 낙점해 두었기 때문에, 네가 한의대를 고집했을 때 아주 많이 애를 태우셨다. 담임선생님, 교감선생님, 교장선생님이 계속 전화를 하셔서는 너를 설득해 보라고 하시는데, 엄마는 너를 지지하는 입장이라 네가 원하는 쪽으로 진로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어. 아마도 그 아들에 그 엄마라는 생각들을 하셨을 거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진로를 변경해 서울대 수시 모집에 응시했는데 쓴잔을 마시게 되자 이건 뭐랄까, 실망이라기보다 어처구니가 없다고나 할까. 우리보다도 학교 선생님들께서 많이 속상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이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 결격사유가 전혀 없었고, 수능 결과 만점은 아니어도 전 영역에서 4개를 틀렸으니 그만하면 됐다 싶었다. 역대 최고의 난이도를 보인 영어 과목도 시험 시간에 10분을 깜빡 자고도 만점을 받은 네가 아니니. 솔직히 네 마음을 바꾸는 것이 힘들었지, 합격이 안 될까 하는 불안 같은 것은 없었어.

 

 정말 그때는 입학사정 담당자들에게 한번 물어 보고 싶었다. 귀교가 대외적으로 그토록 자랑하고 홍보하던 제도의 공정성이 과연 신뢰할 만한 수준인가 하고. 사교육비 제로에, 학업 성적과 수능 성적도 나무랄 데 없고, 지적 탐구 능력도 탁월하고, 품행은 더할 나위없는 네가 탈락된다면 그 제도에 뭔가 허점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엄마만 한 것이 아니었다.

 

 수시에서 일찌감치 끝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정시로 이어지자 모두들 네 일로 많이 신경을 쓰게 되었다. 정시에서 다시 한 번 서울대 지원해 볼 것을 그렇게 권유받으면서도 너는 그야말로 요지부동이었지. 실패라는 게 뭔지 모르고 살아온 네게 태어나 처음으로 작은 상처가 된 것은 아닌가 싶어 엄마가 많이 속상했었어. 서울대 정시 원서 접수 마지막 날 마감시간 30분을 남겨 둔 시간까지도 학교에서는 너를 설득해 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셨는데, 그때는 정말 얼마나 죄송스럽고 난감했는지 몰라. 여하튼 연세대 정시모집 네가 원하는 학과에 소신 지원하여 합격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기뻤다. 4년간의 장학금을 지원 받은 것도 부모에게 큰 효도를 한 거야. 정말 고맙고 자랑스럽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다. 그렇지? 그동안은 누구에게도 네 이야기(자랑)를 한 적이 거의 없었어. 정말 소중한 이야기들은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기 싫잖니. 엄마에게 너란 존재가 그만큼 소중하기에 아무에게나 네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타고난 재능을 떠나 누구보다 맑은 영혼과 인격을 소유한 너를 엄마 가슴 속에만 담아 두지 않고, 블로그에라도 너의 이야기를 조금씩 담아 가려고 한다.

 

 먼 훗날 엄마가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엄마가 너에게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를 계영배로 삼으며 살아가야 한다. 엄마에게 너의 존재가 그토록 커다란 자부심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함부로 세상에 발자국을 남기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실패해도 상관없으나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며 삶의 모든 순간에 빛 가운데 머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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