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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관한 글

내 잔이 넘치나이다!

by 책벌레아마따 2016. 1. 5.

내 잔이 넘치나이다!

                                                                       2015년 12월

 

 지난번 아들이 휴가 나온 다음날, 아침을 차려 놓고는 식사하라고 두어 번 소리를 쳐도 묵묵부답이다. 집에 오니 그간 쌓인 긴장이 풀린 듯해 이럴 때는 밥보다 잠이 보약이겠다 싶어 놔두었다. 그런데 해가 중천에 뜨도록 기척이 없어 살며시 방문을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곤한 잠에 빠져 있다.

 

몇 달 만에 만난 녀석의 잠자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리다. 햇볕에 그을린 팔뚝에는 손목시계가 채워져 있고, 베개 바로 옆에는 군번줄(인식표)을 놓아두었다. 그리고 그 군번줄에는 한 단짜리 묵주를 매달아 놓았다. 매일 밤 불침번을 서고, 하루 24시간 긴장 속에서 출동 명령을 기다리는 생활이 자신도 모르게 습관이 된 듯하다.

 

 하느님의 선물인 이 아이를 임신하고 웬만큼 배가 불러오니 직장 생활이 간단치 않았다. 강의를 마치고 나면 발과 다리가 탱탱 부어 구두를 벗어던지고 싶을 정도였다. 산부인과 주치의에게 임신중독증이 염려된다고 하자 시간을 내어 남편과 방문해 보라고 했다. 그 주 토요일에 남편과 함께 의사를 찾으니, 무거운 물건을 대신 들어 주고 마사지를 해 주고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는 등 생활 속에서 산모에게 도움이 될 만한 방법들을 소상히 일러 주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빠른 시일 내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란다.

 

 건강에 자신만만하던 남편이라 그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정기 검진 차 산부인과에 가는데 남편이 동행하여, 전에 들은 말이 찜찜했던지 그 자리에서 진료 신청을 하고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갑상선암이었다. 그간 건강검진에서도 말짱했고 자각 증세도 전혀 없었는데 암 선고라니 청천벽력과 같았다. 복중의 아들을 포함한 우리 세 식구의 운명이 한 순간에 바람 앞의 등불처럼 느껴졌다.

 

 국내 종합병원의 갑상선 전문의를 수소문한 끝에 그 분야 최고의 실력을 가진 내과의와 외과의를 찾아냈지만, 문제는 양쪽 모두 수개월씩 진료 예약이 밀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불과 며칠 내에 원하던 두 의사의 검진과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중에 산부인과 의사에게도 고마움을 전하자, 의사 생활 20여 년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자신의 환자도 아닌 환자의 남편에게 그날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게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된다면서, 뱃속의 아들이 아빠를 지켜 준 것이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공부를 시작한 아들은 빼어난 학습 능력만큼이나 겸손하여 부모를 욕보일 일이 없다. ··고 때는 주변 친구들의 학습을 성심성의껏 도왔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들로부터도 보조교사로 인정받았다. 아들의 그런 제자(?)가운데 꾸준히 상위권을 지키던 초등학교 동창이 있었는데, 시험 때면 그 친구의 개인교습을 도맡다시피 했다. 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각자 흩어졌다.

 

 작년 아들이 신병교육대를 거쳐 지금의 부대로 전속된 당일이었다. 선임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그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예전에 학습을 챙겨 주었던 바로 그 동창이, 선임 중에도 맞선임이 되어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아들과의 추억들을 기억하며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더란다. 작년에 발생한 군대 선후임 사이의 구타와 따돌림 사건으로 온 나라 안이 들끓었는데, 선임 걱정은 완전히 덜었다. 이런 것이 은총의 고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시편 23장 말씀과도 같이, 돌이켜보면 늘 내 잔이 넘쳐흘렀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않으시고 늘 꼭 필요한 만큼의 물질을 허락해 주셨. 부모 형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하게 해 주셨고, 알맞은 교육을 받게 해 주셨고, 성실한 남편과 재덕을 겸비한 아들을 주셨다. 뒤늦게야 깨달은 은총도 있다. 뜻밖에 얻은 육신의 고통을 통해, 종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마음의 눈이 생긴 것이다.

 

 살면서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란 없고 늘 성령님께서 이끌어 주셨다. 11년 전 비오는 퇴근길에 남편이 한강 다리 가드레일을 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갑작스레 차바퀴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서, 조금만 더 세게 받았더라면 그대로 다리 아래로 추락했을 아찔한 상황이었다. 견인차가 와서 그 자리에서 차를 폐차장으로 끌고 갈 만큼 대형 사고였지만, 남편은 목만 조금 삐끗할 뿐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곳으로 이사 올 때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이 짜 맞춘 듯 진행되었다. 한창 공부할 아이를 부모 의지대로 시골로 끌어내리는 것이 마지막까지 마음에 걸렸지만, 모두의 우려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반듯하게 성장해 주었다.

 

 몇 해 전에는 불청객이 집안을 벌집 쑤시듯 뒤져 놓았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있는 순금 묵주반지며 다이아 목걸이 같은 돈 되는 패물은 놔두고, 은행에서 바꿔 온 신권 20여만 원만 달랑 들고 사라졌다. 어차피 헌금할 목적으로 준비한 돈이었고, 불우한 그분이 집까지 찾아와 직접 수거해 갔으니 따지고 보면 고마운 일이다, 이처럼 받은 은총을 열거하자면 열 손가락 스무 손가락이 부족하다.

 

 내 남은 삶에 있어 더 이상은 바랄 게 없다. 앞으로도 기도하는 삶을 이어가면서, 매 순간 성령님의 빛 가운데 머물 수만 있기를 소망한다. 대단한 것은 못되지만 지금까지는 늘 기도로써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써 하루를 마무리하며 살아왔다. 30년 세월 꾸준히 기도하는 버릇이 몸에 붙은 덕에, 지하철을 타거나 약속장소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그 자투리 시간에도 기도하는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업무 중이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도중만 아니라면 언제라도 기도는 가능하다. 식사 때는 물론 주방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밥을 지을 때도 주모경을 드린다. 밥을 푸거나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우는 짧은 시간에도 얼마든지 화살기도 정도는 드릴 수 있다. 때로는 주방에 누가 들어온 것도 모를 만큼 기도에 깊이 몰입될 때가 있는데, 그래도 기도하느라 음식을 태운 일은 없다. 내게 주어진 하루 24시간 중 단 한 시간만이라도 주님께 오롯이 봉헌하기 위해 묵주기도 5단을 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드리는 것을 생활화하고 있다.

 

 기도란 혼자 조용한 곳에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어야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편견이 아닐까.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정성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 그 순간 성령님의 숨결에 닿을 수 있다. 이런 나의 기도법이 올바른 것인지 누군가에게 검증받아 본 일은 없다. 그러나 기도 방법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성령님께 물든 삶을 사는 일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인수무과(人誰無過)’, 허물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나 또한 허물과 부족함이 많거늘 이토록 분에 넘치는 은총을 내려 주시니, ‘하느님 아버지,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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