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속살
2014년 4월 10일
아베 총리의 망언이 연일 언론을 달구면서, 한중일 간에는 그 어느 때보다 외교적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특히 과거의 침략 역사를 부정하는 발언과 집단 자위권 행사를 위해 관련 헌법의 해석 변경을 획책하려는 듯한 태도는 국제사회의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다만 일본 국민 전체가 정치지도자들의 극단적인 우편향적 역사인식에 동조하리라는 예단은 신중해야 한다. 정치인들의 왜곡된 국가관이 일본 국민의 보편적 정서라 단언키는 어렵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체험한 세대를 포함하여 적어도 내가 만난 일본인들은, 전쟁 도발 금지를 명문화한 헌법을 지지하고 있다.
또한 호전적인 정치권 인사들에 대해 공분을 표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근현대사 부분은 유야무야 넘기라는 윗선의 지침에 분개하던 고등학교 일본사 교사도 만났다. 못난 역사도 자신들의 역사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야마다 씨야말로 친한파답게 역동적인 한국 청년들에게 많은 호감을 가졌던 분이다. 반면에 경제대국의 풍요 속에 타성에 젖은 자국 청년들에게 일본 사회의 미래를 맡겨야 하는 것을 고민하셨다. 일제 강점기 말에 조선총독부 소속 경찰로 근무하면서 무고한 양민을 괴롭히고 평생 죄의식 속에 살았던 어느 할아버지의 눈물어린 고백을 듣기도 했다. 그는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내게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사실 일본인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사생활을 중시하여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간섭 받는 것도 원치 않는다.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이웃에 대한 넘치는 호기심을 ‘정(情)’이라 여기는 한국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메달 순위에 격분하는 일도 드물다. 정치는 더욱 관심 밖이라 두세 명만 모여도 정치 이야기꽃을 피우는 우리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선거철이 되어도 후보는커녕 투표 자체에 냉랭한 유권자를 향해, 오죽하면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욕’을 하라고 읍소하겠는가.
한편 일본인들은 공동체의 조화를 소중히 여기어, 공동체의 균형을 깨뜨리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조폭들도 나름의 윤리강령을 두고 일반시민들을 괴롭히는 일은 없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질병을 앓아도 내색하지 않고 슬픔을 당해도 대성통곡하기보다 홀로 조용히 삭이는 내면적 성숙함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모름지기 ‘부끄러움(恥)’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전통적 신념이다. 그들은 비교적 타인의 비평을 겸허히 수용한다. 일본을 비판하는 서적들이 의외의 인기몰이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인들로부터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는 일본의 허물을 책으로 써 볼 것을 여러 번 권유 받았다. 그만큼 객관적인 시각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다.
일본의 학생운동은 우리보다 조금 앞섰다. 학생운동 절정의 끝인 1969년 1월 19일 ‘전공투(全共鬪 전국 대학 공동투쟁조직)’의 중심에 서 있던 도쿄대학의 야스다 강당이 화염에 휩싸였다. 당시 불탄 흔적의 일부를 오늘까지도 보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소수 과격화 집단의 일탈을 기억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인내와 기다림의 미덕을 가진 국민이지만, 엉뚱한 정치인들이 끝내 브레이크 파열된 자동차처럼 행동한다면 그대로 좌시하지도 묵과하지도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니 우리도 조금 여유를 가지고 일본의 변화를 지켜보자.
유학 기간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일본 사회의 ‘혼네(本音,속)’와 ‘다테마에(建前,겉)’를 익혔다. 그리고서 얻은 결론이, 일본은 여리고 섬세하고 작고 앙증맞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도 움직이는 나라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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