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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관한 글

권력의 딜레마

by 책벌레아마따 2017. 5. 1.

                                         권력의 딜레마

 

                                                                                                              2017년 4월 30일


 기나긴 중국 역사 속에는 수많은 왕조가 명멸한다. 그중 진()최초의 통일국가. 십 년에 걸쳐 한(((((()나라를 차례로 제패하고 마침내 BC 221년 중원을 평정했다. 가히 혼돈의 춘추전국시대를 매듭짓는 대위업이다이후 권력 강화의 목적으로 전국에 36개 군과 그 아래 현을 설치하고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이름하여 군현제(郡縣制)는 이천 년 넘게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런데 진시황(BC 260~210)은 강력한 형벌을 수반한 법가사상을 계승한 탓에 패도정치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폭정은, 유교 경전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처형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다. 또한 북방 흉노족의 침략을 막고자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호화 사치의 극치인 아방궁을 건설하느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가중시켰다.


 다만 진시황을 옹호하는 근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해석도 등장한다. 즉 일국의 사상체계 수립과정에서 불가피한 정치적 행위였으며, 매장한 사람들은 유생이 아니라 불로장생의 묘법 운운하며 혹세무민한 술사였다는 주장이다.


 반면 진시황이 국정에 쏟은 열정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다. 옥사를 판결하고 죽간으로 된 일석(一石 60kg)의 공문을 처리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한서(漢書)는 전한다. 그리고 문자, 법률, 화폐, 도량형 등을 통일함으로써 국가적 통합 체계의 기틀을 닦았다. 인재를 발탁할 때는 출신 성분보다 능력을 따졌다. 무엇보다 제왕적 권위를 내려놓고 이사(李斯), 위료(尉繚), 모초(茅焦), 요고(姚賈) 등 최측근 참모들의 간언을 내치지 않았다.


 진시황이 만나기를 간청하자, ‘상대가 아무리 황제일지라도 절을 하지 않음을 의로 삼는다.’고 버틸 만큼 강단 있던 인물은 돈약(頓弱)이다. 진시황은 그의 무례를 용인하고 외교 담당에 앉혔다. 돈약은 사람의 부류를 들어, 실리는 있고 명분은 없는 자(상인)와 명분은 있고 실리는 없는 자(농민)에 이어 실리도 명분도 없는 자는 바로 진시황이라고 일갈하는 등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그토록 갈망했지만 그저 지천명의 나이에 머물고 말았다.


 그간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들의 별의별 언동으로 대한민국이 요동쳤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어찌 그리 허망하게 결딴내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4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며 대변인 격 인사를 통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라는 짤막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탄핵인용 직후 여론 조사에서 불복6%. 소수 의견이 중요치 않다는 말이 아니다. 각설하고, 사건의 시시비비를 떠나 국민 간 분열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이나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듯한 발언은 국정 지도자의 품격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느껴진다.


 두 사례만 얼핏 보더라도 위없는 진리의 주님께서 거룩한 권능을 가지시고도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것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터라 과연 이것이 인간 권력의 한계인가, 자괴감이 드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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