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함과 천함
일반적으로 사람이건 물건이건 쓸모가 많으면 귀하고 쓸모가 적으면 천할 거라 여기는데 실상은 그와 반대가 아닌가 한다. 더불어서 눈여겨 볼 점은 남들이 소유하지 못한 뭔가를 차지하고 우월감이나 귀족 의식에 심취되는 인간의 속성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뜨겁다. 매장량이 적어 희소가치가 높은 만큼 모두가 탐하는 귀금속의 제왕이 되었다. 하기는 신분·지위·재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서 금 세공품만한 게 없다. 금속이지만 무른 성질 덕에 가공이 쉬운 점도 한몫 거든다. 애초부터 왕이나 귀족 등 소수 지배층을 위해 왕관·허리띠·귀걸이·목걸이·팔찌·비녀·신발·노리개 같은 금제장신구가 될 운명이었던 셈이다. 한편, 금은 장롱이나 금고 속에서 고이 잠자는 대표적 귀금속이기도 하다. 정작 쓸모는 많지 않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철은 금과 달리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금속에 속한다. 그 특성은 단단하고 내구성이 강하며 물질을 끌어당기는 자기적(磁氣的) 성질을 띤다. 실용성이 뛰어나 철기시대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농기구·화폐·갑옷·투구·창·검·공구·건축물 골조 등에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가격 대비 성능 면에서 철을 대체할 금속을 찾기는 쉽지 않다. 특히 산업용 금속으로서의 지위는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귀한 대접은 받지 못한다.
귀천 의식은 명품 브랜드 선호 현상에도 투영되어 있다. 타인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자 평범한 옷이나 가방을 거부하는 일부 소비층의 허영심과 과시욕이야말로 명품이라는 허상을 키우는 일등공신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개중에는 고가의 명품에 흠집이라도 날까 봐 착용을 못하고 그 대신 집에 모셔 두고 혼자 감상하는 이들도 있다. 비록 밥은 굶더라도 명품을 포기할 순 없는 이들은 궁여지책으로 ‘짝퉁’을 선택한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광고를 보면 ‘장인의 손길로 한 땀 한 땀 수놓은’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숙련된 장인의 손끝에서 제작된 특별한 상품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라 짐작된다. 그런데 가격표를 마주한 서민들은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합리적인 가격에 디자인과 소재가 괜찮은 제품이 없지 않건만 가격이나 실용성은 명품족에게 관심 밖이다.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닌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을 오직 귀애할 따름이다. 사실 누구나 소유할 수 있다면 아무도 욕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명품 가방을 소재로 한동안 회자되던 우스갯소리가 있다. 거리에서 갑자기 비를 만난 상황에서 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고 뛰면 짝퉁, 가방을 품에 안고 뛰면 진품이다. 그리고 주인이 스스로 가방 자랑을 떠벌리면 짝퉁, 주인은 가만히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가방 칭찬을 하면 진품이다.
손톱깎이가 세상에 선보인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육체노동이 주를 이루던 시대에는 굳이 손톱을 깎지 않아도 저절로 닳아 없어지니 손톱깎이의 필요성을 거의 못 느끼고 살았을 터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실생활에선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다. 한번 구입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만큼 견고하면서 가격도 저렴하고 편이성도 뛰어나다. 더구나 단순한 기능에 비해 상당한 기술력이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나저나 손톱깎이가 아무리 흔해졌기로서니 가치에 비해 턱없이 하찮은 취급을 당하는 듯해 유감스럽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 귀족층들은 무위도식하면서 신분도 과시할 겸 손톱을 기르고 꾸미는 데 잔뜩 공을 들였다. 몸을 많이 쓰는 직업일수록 긴 손톱은 일하는 데 방해만 된다. 그래서 손톱이 길다는 것은 사람을 부리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일반적이지 않은 풍속이 오늘날에 와서 네일아트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전파되고 있다. 만약 당시 패션 리더이자 네일아트의 원조 격인 그들이 살아 돌아온다면 자신들의 전유물인 줄만 알았던 네일아트의 현대화에 대해 뭐라 이야기할지 궁금하다.
근래 네일아트의 대중적 인기를 보면 여염집 부녀자의 굴레를 벗어나 잠시나마 공주나 왕비라도 된 듯 유쾌한 착각에 빠지고 싶은 여성들의 일탈 심리에서 촉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적지 않은 비용을 지출하면서까지 손톱을 매만지는 심리적 배경에는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인간의 잠재적 욕망이 숨어 있는 듯하다. 어찌 되었건 알록달록 꾸며진 손톱과 발톱이 앙증맞고 귀여운 점은 인정한다.
몇 푼 안 되는 몸값에 팔려간 노예들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면서도 존재감은 미약하고 신분은 천하다. 그러나 놀고먹는 게 주된 업무인 노예 주인의 신분은 높다. 다른 예로 일개미나 일벌은 죽어라 일하지만 천대를 받는다. 여왕개미나 여왕벌은 비록 매일매일 알을 낳아 종족을 보존할 의무는 있지만 무리의 시중을 받는다.
그런데 삶 속에는 예상 밖 반전의 묘미가 있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는 말처럼 입장과 처지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숲속의 나무를 보더라도 아름드리나무가 대들보감으로 먼저 베어져 나가고 오래도록 살아남는 건 잡목이다. 결코 생사, 고락, 선악, 미추, 귀천, 빈부, 유무, 상하, 고저, 장단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행여 인간이 어리석은 분별심을 일으켜 스스로 차별적 고정 관념에라도 빠진다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보잘것없고 허름한 베들레헴의 마구간 구유에서 탄생하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짧은 생을 마치시기까지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해 숱한 사랑의 기적을 행하셨다. 그런데 그 시간 이후 또 다른 차원의 기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 모두의 숭앙의 대상이신 분에서 비롯된 선한 영향력이다. 이천 년의 시공간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가 되어 인류의 삶 전반에 끼친 영향력은 그만큼 지대하다. 한없이 낮은 곳에 임하시고도 더없이 존귀한 분이 되신 이것, 귀천에 관해 이보다 더 위대한 역설적 진리는 없다고 본다.
202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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