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치아 디 스타토’의 신비
‘그라치아 디 스타토(Gràzia di stato)’는 이태리어로 ‘형편이나 상황에 합당한 은총’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심은 아마도 당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저마다 부여된 일생의 소명을 원만하게 수행토록 도우시려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러면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있듯 사람마다 주어지는 은총이 제각각인 데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법하다. 인간은 신의 섭리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각자의 역할과 의무에 따라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 주면서 살아가도록 설계된 존재다. 이는 다양한 형태의 은총이 필요한 근거는 될지언정 결코 구성원 간 우열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데 실상은 은총을 단순비교하고 시기와 질투를 일삼으며 불행을 자초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은총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까맣게 망각한 채 막무가내로 맞춤형 은총을 요구한다. 그런 다음에는 응답이 없다느니, 바라던 응답이 아니라느니, 은총 차별이라느니 유아적 푸념을 늘어놓는다. ‘물 빠진 놈 건져 놓으니 보따리 내놔라’는 식의 생떼와 다를 바 없다. 은총을 청하려거든 먼저 은총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은총이 주어지거든 선한 목적을 위해 활용할 것을 다짐하고 또 실천함이 마땅하다.
이차원적 인간이 사물의 전체를 단번에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한치 앞도 모르면서 지레짐작으로 결과를 예단한 채 좌절하기 일쑤다. 더구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라 여기고, 눈앞에 어려움이 닥치면 세상의 종말이라도 맞은 듯 절망한다. 설상가상 ‘머피의 법칙’에 심취하여 ‘왜 나만 이리 박복할까’ 자신을 힐책한다. 헛된 바람이지만 우리에게도 심안이나 천리안이 있다면 이 같은 우를 되풀이하지는 않을 터이다.
사실 불행이다, 불운이다 규정할 만한 실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행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고, 이슬이 맺혔다가 사라지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욕심을 부려 봤자 뿌린 만큼 거두는 은총의 법칙에도 어긋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은총을 갈구한다. 은총은 하늘에서 ‘무한정·무제한·무상’으로 쏟아지는 비가 아니다. 복을 지어야 복을 받고 덕을 쌓아야 은총을 받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분수에 넘치는 은총은 복이 아니라 독이다.
그건 그렇고 얼핏 봐서 은총인 듯 아닌 듯 헛갈리는 신비로운 은총이 있다. 우리가 이미 경험했거나 아니면 앞으로 경험할, ‘상황에 합당한 시련’이 그것이다. 햇살 한 줌, 바람 한 줄기, 차 한 모금에도 울컥해질 만큼 철이 들려면 돈이든 명예든 사랑이든 건강이든 크게 한 번은 잃어 봐야 한다. 격랑을 헤쳐 나온 연후에야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를 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의 공통적인 후회는 딱 하나, ‘더 많이 사랑할 걸, 더 자주 미안하다 고맙다 말할 걸’이다.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치는 시련을 통해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새록새록 깨우친다면 역설적으로 말해 이보다 더 은혜로운 인생은 없다고 감히 단언한다.
2024. 11. 17.